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69) 하느님 뜻을 선택하고 지켜가는 마음, 식별

한준 (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1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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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지켜 갈 힘까지 주신다

십여 년 전 대학원에서 환경 정책 분야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내가 속한 한국CLC(Christian Life Community) 공동체로부터 외국인 노동자 인권센터 일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나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식별하는 시간을 가졌다. 식별(識別)이란 마음 안에 일어나는 움직임 중에서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선택하는 이냐시오 영성의 한 방법이다.

식별 과정 중에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 안에 일어났다. 무엇보다 전공 분야 학업을 중단하고 전혀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매일 장거리를 출퇴근해야 하고, 급여가 많지 않은 것도 걱정되었다. 한편, 말로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 말고, 실제로도 함께하는 기회를 가져 봐야 한다는 마음도 일어났다. 나보다 앞서 활동가로 파견되었던 동료 회원이 다시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후임을 맡아 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들었다.

이런 마음들 가운데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훨씬 더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활동가로 파견됨으로써 사랑을 더 배워 가기를 바라신다는 생각이 작게나마 들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파견되기로 식별을 했다. 이전까지 인생에서 많은 것을 따지고 안전한 선택들을 해 오며 살았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모한 모험 같았다. 그러나 왠지 이번에 하느님을 믿어 보고 나 자신을 그분께 맡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울러 그렇게까지 어려운 선택을 했는데, 하느님께서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실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파견된 이후 삶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사업주와 심한 다툼이 있는 날에는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면서 내 식별에 대한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걱정과 우려들이 나를 뒤흔들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선택했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혹시 예전 내 식별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굳이 파견되지 않았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주며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별별 생각이 들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이주 노동자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했다. 보람되고 감사한 순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내 식별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이후 다른 회원이 내 후임으로 파견되고 나서야 나는 전공 분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금 그 식별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식별 이후 마음이 힘든 것을 두고 나는 내 식별이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관점에서만 생각했음을 보게 되었다. 하느님과 함께 사랑의 길을 선택했더라도 고통과 어려움이 얼마든지 뒤따를 수 있다는 것도 간과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선택이었음에도, 내 힘듦에 사로잡혀 혼자서 선택의 잘잘못만 따졌던 것이 아프게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수난과 죽음을 겪으면서 ‘아, 이게 아닌데…’라며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선택을 후회하셨을까? 오히려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성삼위의 식별을 더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이다.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선택했던 당시에 하느님께서 주셨던 마음, 그 뜨거움을 잘 기억하고 지켜 가는 것까지 포함한다.

내가 그때 식별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알고, 예수님처럼 식별을 신뢰할 수 있도록 더 기도했더라면, 파견되어 지냈던 시간은 좀 달랐을 것이다. 상황 자체가 바뀌지는 않더라도, 식별 당시 나를 이끄셨던 하느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그분의 위로와 격려를 느끼면서 좀 더 기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사랑에 대한 선택을 마주한다. 사랑을 선택하고서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선택을 지켜 갈 힘까지 주신다. 우리는 그걸 계속 기억해야 한다.

한준 (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