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2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주님 승천 대축일
제1독서(사도 1,1-11) 제2독서(에페 1,17-23) 복음(마르 16,15-20ㄴ)
승천하신 당신 떠나보낸 뒤 하늘 보며 아쉬워하는 제자들
따뜻한 위로와 함께 “복음을 선포하여라” 말씀 남긴 예수님
이별은 또다른 만남의 약속… 이 땅에 주님 뜻 실현시켜야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의 장례미사 때의 일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의 경우 종신서원과 동시에 사후(死後) 시신 처리 및 장례 절차와 관련된 유언서를 작성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미 인위적 연명 조치 포기, 시신 및 장기 기증 그리고 화장(火葬) 등을 요지로 한 유언서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그 선배 신부님께서도 장기 및 시신을 기증한 상태였기에 장례 절차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의과대학병원에서 보내온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담당직원들의 숙련된 움직임에 의해 신부님의 관이 구급차 뒤의 공간에 실리고, 문이 ‘탁’ 닫히니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다. 다른 장례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따로 운구차도 버스도 대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매장이나 화장에 필요한 비용도 필요 없었습니다. 장지에 따라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구급차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참 허망했습니다. 진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제야 살아생전 신부님의 아름답고 멋진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 하나,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이렇게 ‘쿨’하게, 그리고 멋지게 떠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11)

승천하신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난 제자들의 심정 역시 신부님을 떠나보낸 우리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굉장히 허망하고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나머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분께서 떠나신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따뜻한 한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코 복음 16장 17~18절) 물론 제자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은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코 복음 16장 15~16절)

■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 승천 사건 앞에서

예수님 부활에 이은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이 모든 사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도 기상천외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기이한 사건이었기에 목격자들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 없이, 어린이다운 전폭적인 의탁 없이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각자 앞에 던져진 하나의 큰 과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는 우리 각자의 시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랑의 눈, 희망의 눈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린이다운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앞에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우리들, 어리둥절한 표정 짓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제 하늘이 아니라 땅, 우리 모두가 아등바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도소 도시(Dosso Dossi) ‘그리스도의 승천’ (일부).

■ 또 다른 이별 앞에서

승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