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처음엔 달아나려 했던 일도… / 김지영

김지영(이냐시오)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대우교수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1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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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계절이었던 것 같다. 지난 2016년, 나는 사무실에서 모르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옥현진 광주대교구 총대리주교(당시 보좌주교). “한번 뵌 적도, 소통한 적도 없는데 무슨 일일까?”

용건인즉, 그해 가을 인천에서 제20회 한일 주교 교류모임이 있을 예정인데, 기조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옥 주교의 말씀은 이어졌다. 그 해의 주제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군수산업과 미디어’로 한국 측이 ‘미디어’를, 일본 측이 ‘군수산업’을 맡았는데 번역 시간도 필요하니 언제언제까지 미리 강연 자료를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나는 황급하게 사양했다. “아는 것도 없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옥 주교께서는 일말의 양보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친절하고 상세하고, 차분하게 행사에 대해 설명하고는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틀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역시 결론은 “아니다”였다.

세례를 받은 지 10년이 됐다고 하나, 아직 믿음도 교회지식도 일천하기만 한 내가 한일 양국의 천주교 수장인 주교들, 인품과 권위에 지식도 높은 그분들 앞에서 무슨 강연을 한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옥 주교께 전화를 걸어 단호하게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이 말에 옥 주교는 뜻밖의 카드로 대응하시는 것이었다. “제 뜻이 아니라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윗분인 OOO 주교님이 나를 지목해 주문하셨다는 것이다.

“아이고….” 나는 달아날 생각을 포기하고 강연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면서 초짜 신자 때에 품었던 마음에 불을 지피면서 자신을 북돋우었다.

“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많이 바친다고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진심, 나의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게 중요하다고 전해주었다. 저널리즘은 내게 소중한 직업적 소명이며, 인간존중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교리와도 지향이 같다. 저널리즘 관련 작업으로 신앙생활과 함께 봉헌을 할 수 있다니 큰 다행이다. 못할 것이 무언가, 오히려 감사하지. 엄청난 압박을 주는 ‘주교님 집단’도 취재기자로서 취재원을 대하듯 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

지난 1996년 주교 다섯 분의 참여로 시동을 걸었던 한일 주교 교류모임은 이제 마흔 분 넘는 대부분의 주교들이 참여하고 있다. 해마다 번갈아 상대국을 방문해 2박3일 일정의 행사를 진행한다.

모임의 고정 의제는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 이와 관련한 사목교류, 사회문제는 부수적 의제이며 구체적인 연간 주제는 해마다 따로 정한다. 특히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의제는 한일 양국이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아픈 역사를 성찰하고 형제적 친교로서 양국 간(또는 여러 국가 간) 갈등과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화해를 실현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 평화를 심자는 데에 초점이 있다.

나는 교류모임의 고정 의제인 ‘동아시아 평화’와 그해의 주제 ‘미디어와 국가관’에 맞추어 강연원고를 구상하고 작성했다. PPT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제작했다.

원고 내용을 매우 간단하게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한중일 3국 중심의 동북아 지역 평화를 위해서는 각국 정부와 정치인 못지않게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이 2차 대전의 같은 가해자인 독일과 달리 과거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은 동아시아의 평화에 암초가 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언론매체들조차 국익이라는 명분아래 이 같은 정치인들의 행태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이나 중국의 언론매체들도 일본에 대해 경쟁적·감정적이며 국가주의적인 태도로 선정보도를 하기 일쑤여서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다. 한중일 3국 언론들은 이웃나라들에 대해 좀 더 정확·공정·객관이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살려 보도해야 한다. (많은 설명과 실제 사례를 곁들였다)

나는 그해 11월 15일 무사히 강연을 마쳤다. 그뿐 아니라 공들여 만든 강연 자료를 대학 강의 시간에 활용함으로써 덕을 보았다. 처음엔 맡지 않으려고 버티었지만, 힘들여 하고보니 소중한 봉헌이 되고 나 자신에게는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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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이냐시오)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