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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9) 김대건·최양업 기도하다 (상)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5-03 수정일 2021-05-07 발행일 2021-05-09 제 324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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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 닥칠 때마다 성모님의 보호에 매달려 극복
김대건, 조선 입국 시도할 때 마리아께 전구 청하며 한 발짝
폭풍우 만나고 탈진 상태에도 동료들에 성모 상본 보여주며 용기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해
성모성심회 가입했던 최양업 평소 마리아 도움 자주 언급 
신자들에 묵주기도 가르치고 묵주 만드는 법도 익히게 해

교회는 5월을 성모 성월로 정해 신자들이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며,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고,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도록 권고한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박해 시대를 살아가던 신자들이 마리아를 깊이 공경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기도하는 모습에서도 마리아를 향한 깊은 신심이 드러난다. 이번 편에서는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기도하던 두 사제의 시간을 걸어본다.

■ 묵주기도를 바치는 김대건

“사방에 눈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어찌나 지루한지 묵주의 기도를 수없이 거듭했습니다.”

1845년 겨울, 의주에서 8㎞가량 떨어진 숲속.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강복을 받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 조정은 김대건이 마카오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귀국하는 대로 즉시 처형하도록 지시해 국경의 감시가 삼엄한 상황이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연락원 역할을 하는 신자들을 먼저 보내고, 김대건 홀로 산골짜기를 찾아 한겨울에도 울창한 숲속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붙잡힐지 모를 그 긴장감 속에서 김대건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땀이 아니라 묵주였다. 김대건은 묵주를 쥐고 쉼 없이 마리아에게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빌어주길 청하고 또 청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기도한 끝에 김대건은 어둠을 틈타 입국을 시도했다. 김대건은 그 길로 마침내 한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돼 고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성공한 조선 입국이었다.

첫 조선 입국에 성공한 순간, 김대건은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김대건에 관한 사료 속에서 묵주기도에 관한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적은 기록 속에서도 김대건이 묵주기도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했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김대건은 1844년 5월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요청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라고 강조하면서 “성모님의 무염시태 상본과 십자고상과 묵주”를 부탁하기도 했다.

■ 묵주를 만드는 최양업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주시되 묵주는 보내지 마십시오.”

최양업은 1857년 조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며 묵주를 보내지 말라고 전하고 있다. 신학생 시절부터 리브와 신부와 함께 성모성심회에 가입할 정도로 성모신심이 깊은 최양업에게 묵주가 필요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터였다. 최양업이 묵주를 마다한 이유는 신자들이 스스로 묵주를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양업은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최양업은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든다”고 조선 신자 자랑을 덧붙였다.

최양업은 같은 시기 르그레즈와 신부에게도 편지를 보내 묵주를 청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최양업은 “신부님께서 조선의 모든 교우들에게 줄 만큼 묵주를 갖고 있지는 못한 줄 잘 안다”며 “줄 수 없는 것을 청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줄 마음이 있기만 하면 줄 수 있는 것을 청한다”며 “묵주를 견고하게 잘 만드는 도구” 즉, 묵주 만들 때 사용하는 집게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최양업은 “(집게를 보내주면)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를 조선 교우들에게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는 셈”이라고 넉살 좋은 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묵주를 만드는 일은 곧 더 많은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최양업은 그렇게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널리 알렸다.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앞에 있는 한국 순교자의 모후이신 성모상. 성모께 대한 굳은 신심을 가졌던 김대건·최양업 두 사제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과 마리아께 도움을 청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보호하시는 분, 성모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김대건은 1843년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마리아의 보호에 대한 굳은 신뢰를 보였다. 김대건과 최양업이 묵주기도를 바치고 가르쳤던 이유는, 두 사제가 마리아의 전구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양업의 경우도 편지를 통해 자주 마리아의 도움과 보호를 언급했고, 마지막까지도 마리아의 전구로 기도해 줄 것을 청했다. 최양업은 1860년 경신박해로 포졸들의 추적이 날로 옥죄여 오자 “이것이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하다”며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한다”고 전했다.

두 사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운 난관 속에서 마리아의 도움을 청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랬지만, 부제 김대건이 조선에서의 준비를 마치고 다시 중국을 향하던 바닷길에서 그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다.”

김대건과 11명의 신자들은 하루 동안은 무사히 항해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식량을 잃고 3일 동안 먹지도 못한 채 모두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다. 신자들은 “이제는 다 끝났다”며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겠다”고 서글피 울기 시작했다. 이에 김대건은 자신 역시 지친 와중에도 ‘마리아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신자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김대건이 탄 배는 또다시 폭풍을 맞아 돛대도 돛도 키도 종선도 없어 항해를 지속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김대건은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처지”라고 말하면서도 “지극히 영화로우신 우리 동정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배에 남아 있던 나무를 있는 대로 다 거둬 돛대와 키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김대건의 배는 마침내 중국에 다다랐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이 사건을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성모 마리아! 저 바다의 별이 김(대건) 안드레아가 위험한 여행을 하는 동안 등대 노릇을 해 주셨고, 그가 조선에 돌아올 때에 조그만 라파엘호의 나침반 노릇을 하신 것도 성모 마리아였다”며 “그의 성화가 늘 돛대 밑에 펼쳐져 있고, 낮에는 그에게 보호를 구하고 밤에는 그에게 호소했으며 선교사들이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바다와 박해의 모든 위험을 면했다고 믿은 것이 옳은 생각이었다”고 묘사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연구한 조규식 신부(대전교구 원로사목)는 “마리아께 대한 희망은 역경과 장애 속에서 더욱 굳어졌으며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다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며 “마리아 신심은 영성 생활을 보다 풍부히 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일치하도록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제물진두순교성지

제물진두순교성지(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40)는 부제 김대건이 한양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다시 중국을 향할 때 출발한 지역이다. 김대건이 이곳을 지난 지 20년 뒤 제물진두는 순교터가 되기도 했다. 성지는 제물진두에서 순교한 10명의 순교자도 현양하고 있다.

인천교구 제물진두순교성지 입구. 성지에서 순교한 10위의 성화가 성모상과 함께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