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추기경님은 무슨 책을 쓰셨어요?” / 이승훈 기자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5-03 수정일 2021-05-04 발행일 2021-05-09 제 324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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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님은 무슨 책을 쓰셨어요?”

8년 전 정진석 추기경이 어린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어린이가 질문했다. 당시에도 이미 50권 이상의 저서를 낸 정 추기경이었다. 내심 ‘저 아이가 정 추기경이 얼마나 많은 책을 썼는지 알면 놀라겠지’라고 생각하며 지켜봤다. 정 추기경은 그 특유의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이에게 대답했다.

“그건 정말로 훌륭한 질문이에요. 몇 권을 썼느냐는 질문보다 훌륭해요.”

정 추기경은 어린이를 크게 칭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재주를 주셨는지 알고, 그 재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하고 소망하며 살길 바란다”며 그 어린이의 소망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책이든 사람이든 그를 나타내는 숫자가 아니라 무슨 책인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놀랄 줄 알았던 어린이는 웃었고, 웃고 있던 나는 놀랐다. 문득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중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어른들은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이라는 말보다 “10만 프랑짜리 집”이라는 말에서 감탄한다고. 그곳엔 어린이들이 있었고, 어린이와 같은 정 추기경이 있었고, 어린이와 같지 않은 내가 있었다.

정 추기경의 장례에는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함께하지 못했다. 인산인해를 이뤘던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와 크게 대비되는 숫자다. 하지만 정 추기경은 그리 서운하지는 않으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와 같은 정 추기경은, 그저 지상에 있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