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천주 섭리 수녀회(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1-05-03 수정일 2021-05-04 발행일 2021-05-09 제 324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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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때부터 교육·의료사도직에 주력
1966년 한국 진출한 이후 줄곧 가난한 이 위해 활동

2016년 5월 1일 수녀회 본원에서 한국진출 50주년을 기념해 회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독일 마인츠교구 설립 수녀회로 자리를 잡아가던 천주 섭리 수녀회는 회원들이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모색하게 된다. 당시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전개한 반(反)가톨릭교회 운동 ‘문화투쟁’의 여파 때문이었다. 문화투쟁으로 가톨릭교회의 종교 교육과 선교 활동은 국가로부터 큰 통제를 받아야 했고 수도회들은 새 회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대적 혼란은 회원들이 봉사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나서는 배경이 됐다.

그런 흐름 속에서 1876년 미국으로 수녀회 카리스마와 사명을 확장한 천주 섭리 수녀회는 이후 1884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인준받았다. 나중에는 독일과 미국에도 각각 세 개 관구가 설립됐다.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66년이다. 수녀회는 모든 수도회가 해외선교에 투신하기를 바랐던 비오 12세 교황 요청에 따라 1961년 페루 아방카이에 진출을 시도했고 이어서 한국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영향을 미쳤다. 1959년 총회에서 해외선교 동의안을 결의했던 수녀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가톨릭교회의 해외 선교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의 활동도 긍정적으로 모색했다.

특히 초대 대전교구장 라리보 주교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 수도회들이 한국인 성소자를 양성해 성공적으로 선교지에 파견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이에 라리보 주교는 천주 섭리 수녀회 총원에 의료 선교를 위한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수녀회는 1963년 한국을 방문해 상황을 살폈고 이듬해 대전교구 고(故) 오기선 신부 주선으로 한국인 지원자 13명이 로마 총본부에서 기초 양성 교육을 받았다. 1966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대전교구 진출을 승인받고 서울에서 공동체를 시작한 수녀회는 대전교구에서의 의료사도직 시도가 여의찮게 되자 인천에 수녀원과 수련소를 설립했다.

이후 수녀회는 1971년 인천시립병원에 간호 수녀를 파견함으로써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1978년 은인들 도움을 받아 후원회인 ‘섭리가족회’를 구성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에 협력했다.

수녀회 창설 때부터 교육사도직과 의료사도직에 주력했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수녀회 활동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초점이 맞춰졌다. 기관을 설립해 운영하기보다는 수녀들을 필요로 하는 곳,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도직 선택에 집중했다.

1995년 성요셉 관구로 승격된 후에는 사회복지 관련 사도직에 주력하면서 사회적 사안에 관심을 넓히고 외국인 근로자 상담 사도직 등도 시작했다. 현재 관구는 교육, 본당 및 해외선교, 사회복지, 의료사도직 분야에서 소임을 맡고 있으며 JPIC(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활동 등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다. 아울러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사회정의 실현 및 지구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