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3) 중국 천주교 대표 평신도 서광계

신의식(멜키올)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장·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을
입력일 2021-04-27 수정일 2021-04-28 발행일 2021-05-02 제 324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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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고하 막론하고 천주교 전파에 앞장서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 비롯 서양 학문·천주교 교리에 감명
남경에서 구태소의 제안으로 마테오 리치 직접 만나기도
세례 받은 뒤 전교에 큰 역할
「기인십편」 「영언여작」 등 여러 교리서와 호교서도 저술
조선에 천주교 전파 시도 ‘눈길’
상해교구에서 시복 추진 중

예부상서 겸 문연각대학사 서광계 초상화.

“주님께서 서광계에게 상을 내려 하루빨리 복자품에 오르게 하소서.

가경자 서광계 교우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중국 상해교구 ‘서광계 시복기도문’ 중)

■ 빛과 말씀의 만남

중국교회 평신도를 대표하는 서광계(徐光啓)는 1562년 상해현 태경방(太卿坊)에서 서사성(徐思誠)과 전(錢)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광계가 천주교를 처음 접한 것은 1595년 광동성 소주(韶州)에서 예수회 이탈리아 선교사인 카타네오(Lazaro Cattaneo, 중국명 郭居靜, 1560~1640)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이때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가 출판한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를 보게 됐고, 천주교 교리와 서양 학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1597년 봄 순천부 향시(鄕試)에서 해원(解員, 향시 1등)으로 합격했고, 당시 관례에 따라 향시 지공거(향시 주감독관)인 초굉(焦竤)과 서광계는 사제관계로 맺어졌다.

1600년 북경으로 회시(會試)를 보러 가던 서광계는 스승인 초굉을 예방하고자 남경을 방문했을 때, 당시 불교 승려들과 대담을 위해 마테오 리치의 초대로 남경에 와 있던 구태소(瞿太素)의 제안으로 마테오 리치를 만났다. 과거 낙방 후 고향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서광계는 1603년 마테오 리치를 만나기 위해 다시 남경을 방문했으나 마테오 리치는 이미 북경으로 떠난 후였고, 로챠(John de Rocha, 중국명 羅如望, 1566~1623) 신부로부터 「천주실의」와 「천주십계」를 받아 와 독파한 후 세례받기를 결심했다.

서광계는 세례 때를 회상하면서 “당시 세례를 받기로 했을 때, 십계명(十誡命)을 지키는 것은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첩을 두지 말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외아들만 두었고, 손자가 없었으므로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중국 사대부가 천주교에 입교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축첩’(蓄妾) 금지였다. 로챠 신부가 “자식이 있고 없고는 주님의 뜻이다. 어찌 계를 범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자, 서광계는 주저 없이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을 바오로라고 했으며, 일생 동안 첩을 들이지 않았다.

■ ‘성령의 배려’와 풍성한 세례 선물

세례를 받은 다음 해인 1604년 42세의 서광계는 세 가지 큰 선물을 받았다. 첫째는 외아들 기(驥)가 장손인 이각(爾覺)을 낳은 것이고, 둘째는 본인이 회시(會試)에서 88등, 전시(殿試)에서는 3갑 55등으로 급제한 것이다. 서광계는 “두 번의 회시 낙방은 ‘성령의 배려’였다. 낙방하지 않았다면, 당시 상황으로 첩을 들였을 것이고, 첩을 금지하는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므로 천주교에 입교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셋째는 새 삶의 시작이었다. 한림원 서길사에 임명된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와 왕래하며 천주교 교리뿐만 아니라 서양의 천문 역산학을 배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기하원본」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모든 도수(度數)의 학(學)을 의미하는 기하, 점, 선, 면, 평행선, 직각, 예각 등의 단어는 서광계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중국 상하이 광계공원의 서광계 묘. 서광계 무덤에는 4명의 손자 부부도 함께 묻혀 있다.

■ 서광계식 개교(開敎) 방식으로 조선 천주교 개교?

서광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주교를 전교했다. 1606년 북경에서 73세의 부친과 부인 오씨 그리고 장남이 세례를 받았다. 1607년에 그는 상해에서 부친상을 치르면서 남경에 있던 카타네오 신부를 상해로 초청해 상해현과 포동을 개교시켰고, 이때 세례받은 사람이 200여 명이나 됐다. 부친 상중에도 서광계는 정3품 포정사인 허락선을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1577~1628) 신부에게 인도해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했으며, 자신의 둘째 손녀인 서 칸디다(Candida)를 허락선의 손자인 허원도와 혼인을 맺어 줬다.

당시 서광계는 자손의 혼인 관계, 친구, 지인,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고향에 천주교를 개교하는 ‘서광계식 개교’로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서광계와 함께 중국천주교의 3대 주춧돌로 불리는 이지조와 양정균(이 둘은 절강성 항주 개교)의 세례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이외에도 서광계가 천주교로 인도한 인물로는 제자인 손원화(강소성 가정 개교)와 한림·한운 형제(산서성 강주 개교)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을 천주교로 개교시키고자 한 서광계의 노력은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다. 남경교난을 이유로 1619년 관직에 나가지 않았을 때와 복직됐던 1621년, 서광계는 만주족의 요동 침략에 대한 타개책으로 조선에 청병(請兵)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청병을 이유로 조선을 방문해 자신의 방식으로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일은 허락되지 않아 조선 개교는 실현될 수 없었다.

서광계 묘 앞의 십자가. 십자가에는 ‘십자가를 영원히 존경하고 의지하라’(十字聖架 百世瞻依)고 적혀 있다.

서광계가 번역한 「기하원본」.

■ 교리서와 호교서

서광계는 교리서도 편찬했다. 대표적인 교리서로 그가 마테오 리치와 함께 저술한 「기인십편」(畸人十篇)을 들 수 있는데, 특히 3~4편은 서광계와 마테오 리치가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쉽게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또 그는 삼비아시(Francisco Sambiasi, 중국명 畢方濟, 1582~1649) 신부와 함께 영혼에 관한 교리서인 「영언여작」(靈言蠡勺)을 저술했으며, 또 판토하(Didace de Pantoja, 중국명 龐迪我, 1571~1681) 신부의 「칠극」에서 사용한 단어들이 서로 뜻이 통할 수 있도록 윤색에 도움을 줬다. 이 책들은 「천주실의」와 함께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천주교 호교에 있어서도 서광계는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을 볼 수 있다. 1608년 남경 예수회원들의 거처에서 생활하고 있던 구태소가 불로장생을 탐닉하자, 서광계는 그에게 1주일 피정과 한 차례의 고해를 강권하며 바른 길로 인도했다. 1615년 정3품인 남경예부시랑으로 남경에 부임한 심각(沈㴶)은 동료이자 독실한 불교도였던 양정균이 천주교로 귀의하고, 자신의 스승인 항주 운루사 승려인 연지(蓮池)와 불교를 비판한 것에 앙심을 품고 천주교를 무고하며 1616년 5월 8일 상소문을 올리면서 남경교난을 일으켰다. 이에 서광계는 천주교는 잘못이 없으며, 잘못이 있다면 본인도 함께 처벌받겠다는 내용의 ‘변학장소’(辨學章疏)를 상소해 천주교를 변론했으나 교난의 타격은 상당했다. 그는 또 「벽석씨제망」(闢釋氏諸妄)에서 “석가모니는 사람의 혼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라며 불교의 한계를 지적했고, 「변불봉조선설」(辨不奉祖先說)에서는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지, 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며 천주교의 효경을 강조했다.

■ 역법 개정: 선교사 위상 확립

부친상 3년 탈상 후, 1611년 북경에 복직한 서광계는 흠천감(欽天監)에서 일식(日食) 추정의 잘못에 대한 논의가 일자, 판토하를 역법 개정의 적임자로 추천했다. 이에 예부도 동의하자 이지조, 판토하, 우르시스(Sabbathin de Ursis, 중국명 熊三拔, 1575~1620) 등이 역국(曆局)에 종사하게 됐고, 그 책임은 서광계가 맡았다. 서광계는 선종 직전인 1633년 9월 이천경(李天經)과 아담 샬(Adam Schall, 중국명 湯若望, 1591~1666)을 역법 개정을 이어가도록 천거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 10월에 선종했다. 이런 서광계의 노력으로 「숭정역서」(崇禎曆書)의 완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상해교구의 청원으로 현재 서광계의 시복 심사가 교황청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천주교 대표 평신도 서광계의 빠른 시복을 기도한다.

신의식(멜키올)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장·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