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117. 가치에 대한 성찰 - 올바른 희망이란 무엇일까 4. 하느님과 희망을 선택하게 돕는 것

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입력일 2021-04-27 수정일 2021-04-28 발행일 2021-05-02 제 3242호 1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상처 치유하고 빛으로 걸어가도록 힘 북돋워 주어야
「간추린 사회교리」 60항
절망에 빠진 이들과 함께하며 희망 찾는 길을 동행하는 것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

2017년 7월 2일 의정부교구 신곡2동성당에서 열린 이한빛 PD 추모제에서 신자들이 초를 밝히고 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제공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덤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혔으니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들도 계속해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중)

■ 삶의 아픔들

정들었던 노동사목을 떠나 다른 소임지로 와서 “얼굴 좋아지셨네요?”라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안부인사에 감사하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노동사목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제로서 세상을 좀 더 넓고 깊이 바라보는 기회였습니다. 노동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문제이면서 삶을 지배하는 관심사입니다. 취업, 실업, 삶의 질과 행복, 성취와 자존감, 가족과 생계 이 모든 것이 얽혀 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갈등과 대립이 개인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 속의 일들을 복음적 시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구현하고 사람과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노동사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산업재해나 노동분규로 가족을 잃은 딱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신자분들도 계셨는데 아들을 잃은 김혜영(사비나) 자매님이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아들 프란치스코가 열악한 방송 제작 노동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2016년 10월 26일, 입사 9개월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희망과 일어섬

곧 5년여가 돼 가는 이 사건은 당시 가족과 회사 간 쉽지 않은 대화를 통해 사측의 공식적 사과와 제작환경 개선에 대한 약속 등을 골자로 종료됐습니다. 그러나 황망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분들, 고통받는 분들은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무엇이 희망일까요? 무엇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고통받는 욥에게 건넨 친구들의 위로가 하느님께 야단을 맞는 것을 보니 섣부른 이야기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욥기 42,7-9) 그런데 욥기의 결말은 욥의 회복으로 매듭되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잃은 욥이 회복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분명히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시련에서 일어선 욥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비나 자매님도 그런 욥이었습니다. “저는 아들 한빛을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킬 것입니다. 한빛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한빛이 이 사회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가 실현될 때까지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께 진실을 밝히는 데 함께 해 달라고 도와 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립니다.”(2017년 4월 18일 이한빛 PD 추모제 중) 저는 이를 통해 부활을 체험의 언어라 이야기하듯, 희망도 체험의 언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 희망은 길처럼

오랜만에 사비나 자매님을 뵀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픔이 가시지 않았음을 직감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먼저 보내면 그를 가슴에 묻는다더니 저도 마음이 애잔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뭔가를 찾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희망일 수도, 하느님일 수도 있는 뭔가를 말입니다. 바로 사랑하는 아들 때문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절망과 포기가 아닌 희망과 삶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참된 희망이라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삶은 아픔이나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고, 그 슬픔을 듣고 헤아려 주는 역할이 중요하겠지요.

「간추린 사회교리」는 교회 공동체의 여정이 역사의 한복판에 있고(60항) 희망을 잃은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69항) 분명 희망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하느님과 희망을 포기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희망을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잠시라도 희망을 찾는 그 길을 함께 걸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나 봅니다.(루카 22,32) 희망은 함께 만들 때 더 쉽게 만들어집니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 계획에 협력하도록 부름받는다.”(「간추린 사회교리」 60항)

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