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아내의 ‘물귀신 작전’에 말려들다

임방수(마르코ㆍ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본당)
입력일 2021-04-27 수정일 2021-04-27 발행일 2021-05-02 제 324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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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등 타지에서의 약 40년 세월을 마무리하고 대전 옛 집으로 귀향했다. 하지만 고향에 온 것이 후회되기도 하고 간간이 외로움에 젖기도 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취미로 꽃 가꾸기를 하기로 했다. 어느날 화단에서 함께 풀을 뽑던 아내가 뜬금없이 “여보! 우리 성당에 나가면 안 될까?”하기에 나는 황당해 “당신 뭐 잘못 먹었어?”라는 말로 일축해 버렸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조상님들 제사 지내는 것 이외는 다른 종교에 발을 들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내가 한동안 성당 이야기는 안하기에 포기 한 것으로 간주했다.

별다른 의견 충돌 없이 생활하던 중 아내가 외출했다가 귀가하더니 작심한 표정으로 “여보! 용서해줘요, 실은 나 성당에 나가 미사 봉헌하고 오는 길이에요”라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이유를 물으니 아내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부터 성당에 몰래 다니던 딸이, 아내에게 성당에 다닐 것을 권했다는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 배신감이 들어 당장에 딸에게 전화를 해 호통을 치며 “집에 오지도, 전화도 하지 말라!”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배신감과 서운함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날은 평소와 달리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과음을 하고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꿈속에서 딸이 무릎을 꿇고 “아빠 용서해주세요!”하며 울음 섞인 기도를 하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떠보니 실제로 딸과 아내가 내 옆에서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술이 확 깼다. 딸은 “대학 생활부터 지금의 직장 생활에 이르기까지 객지에서의 홀로 생활이 너무나 힘들고 외로워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아 왔다”면서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 식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딸에게 말 못 할 아픔과 힘든 삶이 있었다는 것을 간파 못하고 살아온 내가 미웠다.

우리들은 밤이 깊도록 아주 많은 이야기를 진솔되게 나눴다. 나는 제사 모시는 일에 충실할 것과, 내게 성당 나갈 것을 강요하지 말 것 등 단서를 달고 아내와 딸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날 저녁 내내 조상님들께 집안 단속 제대로 못한 종손이 되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우리 집에 얼마간 평화가 찾아 온 듯 했다.

2007년 10월 초로 기억된다. 아내가 미소 가득 찬 얼굴로 “여보! 나 오늘 아주 멋진 풍경을 봤거든”하며 내게 바짝 다가왔다. “80대 노부부가 손 꼭 잡고 성당에 나와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이더라구. 나도 당신과 손잡고 성당에 나가는 것이 소원인데 들어줄 수 있어?”라는 것이었다.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일이기에 “지난번 약속 잊었어, 이제는 물귀신 작전까지 하는 거여? 택도 없는 소리 마!”라고 소리쳤다. 이에 꼬리를 내리며 아내는 “알았어요!”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큰소리는 쳤지만 마음 한구석 꺼림직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성당 다녀올게요”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한동안 심신이 혼란스러워 힘들었다. 아내가 나를 사지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니, 나는 두 손 들어 항복하고 아내 소원대로 하기로 했다. 아내는 하늘을 향해 “하느님! 저희 기도를 들어 주시어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첫 주부터 아내와 손잡고 집에서 5분 거리의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본당에 발을 들여놓아 주님 품에 안겼다. 집에서 단 5분 거리에 계신 주님을 만나는 데 6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걸린 것이다.

2008년 1월부터 8월 말까지 예비신자 교리를 받으면서 조금은 하느님을 알게됐다. 레지오에 입단하던 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교리를 알아 가는 재미에 몰입하게 됐다. 아내와 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져 성가정을 이루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주님을 성실히 모시면서 교우들과 친분을 돈독히 가꾸어 나가면서 노후를 밝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 늦게나마 아내와 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임방수(마르코ㆍ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