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천주 섭리 수녀회(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1-04-20 수정일 2021-04-20 발행일 2021-04-25 제 324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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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와 가난한 이들 위한 공동체

케틀러 주교와 마리 드 라 로쉬 수녀. 천주 섭리 수녀회 제공

1891년 5월 15일 발표된 레오 13세 교황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는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해결 방책과 이론을 분석·비판하고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 원리를 제시한 가톨릭 사회교리 분야 대헌장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마인츠교구장 빌헬름 엠마누엘 폰 케틀러 주교(1811~1877)는 회칙이 발표되기 40여 년 전부터 이미 당시 심각하게 제기되던 사회 문제들, 특히 노동자 문제에 대해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밝혔다. 또 그 구체적 해결을 위한 방안 모색에도 나섰다. 이러한 활동들은 회칙을 세상에 나오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1844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가난하고 병든 지역 주민들을 돌보며 사회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850년 마인츠교구장 주교로 서품되고 나서 이를 실천하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케틀러 주교는 당시 사회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적대시하는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파악했다. 교회를 위협하던 무신론에 대항해 교회와 인간의 참된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특히 어린이들의 교육과 복지 및 도덕 문제를 고심했다.

1869년 독일주교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회정의 실천’이 가톨릭 공직자의 의무임을 강조했으며, 주교직을 수행하는 27년 동안 「노동 문제와 그리스도교」(1864)를 포함한 92개 사목 서한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기고문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사회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사태」는 케틀러 주교가 제안했던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의 휴일 보장 등을 참고했다.

그는 폐쇄된 신학교를 다시 열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남녀 수도회 창설을 과제로 삼았다. 교구를 사목 방문하면서 여러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은 교육과 간호 사업에 종사하는 수녀회를 두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및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 판단한 케틀러 주교는 여러 수녀회에 이 문제를 의뢰해 협조를 구했지만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수녀회 초대 원장이 된 마리 드 라 로쉬를 만나게 된다. 프랑스 개신교인이었던 마리 드 라 로쉬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수녀회 입회도 거절당한 상태였다. 케틀러 주교는 그의 내적 성숙함과 타인에 대한 관심, 하느님 뜻을 완수하려는 각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심중에 있던 새로운 공동체 설립에 함께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그녀는 이에 동의했다.

마침 1851년 4명의 여성이 수도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휜튼본당 주임 안톤 아우취 신부에게 밝혔다. 이를 전해 들은 케틀러 주교는 심사숙고한 끝에 수녀회 창설을 결정했다. 그해 9월 29일 네 명의 여성이 입회했고, 새 수도회 명칭은 ‘교육과 간호를 위한 천주 섭리 수녀회’로 정해졌다. 수도회 이름은 두 차례 개정을 거쳐 천주 섭리 수녀회가 됐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