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장지동성당 연가(牆枝洞聖堂 戀歌) 10 - 그분의 뜨락에서 인생 한 잔 마시며 석양을 / 정연혁 신부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1-04-20 수정일 2021-04-20 발행일 2021-04-25 제 324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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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를 많이 마시고 진하게 마시다 보니 ‘삼박자’ 커피라고 부르는 믹스 커피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됐습니다.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조그만 본당이다 보니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미국의 지인에게 원두를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8년 전 일인데, 그 이후로 제가 커피 원두를 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소비는 생산의 어머니라는 자본주의 원리가 이렇게 성당에서 잘 통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커피를 내렸고 신자분들과 즐겨 마시려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당에 출근하면 커피를 내려 신자분들이 강제로 한 잔씩 드시게 합니다. ‘본당신부가 내린 커피를 맛보지 않으면 우리 본당 신자가 아니다’는 협박까지 하면서요. 월요일 아침에는 미사 참례 인원이 많아야 20명인데, 미리 내린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가서 미사 후 ‘모닝커피’로 마시는 맛이 쏠쏠합니다.

커피는 핑계이고 신자분들과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그 커피 한 잔으로 대변되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순간들이 사제와 신자에게는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겠지요. 왜냐하면, 그로 인해 나눈 수많은 이야기에 담긴 겹겹의 가슴 안쪽에 쌓인 것들이 우리 삶의 진솔한 모습이고 신자분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진정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커피를 계속 내려 볼 생각입니다.

성당 마당을 가끔 커피잔을 들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하느님 뜨락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마구 이릅니다. 저 역시 남의 이야기만을 담고 살만한 큰 그릇이 못 되기에, 반드시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오밤중에 방에서 십자가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겠지만 성당 마당은 또 다른 풍미를 줍니다. 산 위에 있는 우리 성당 특성상 바람도 별도 구름도 하늘도 그리고 햇빛도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신자들과 마시던 커피를 하느님과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것이 신부인가 싶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길고 긴 세로선이 되라는 소명에 충실한 듯 느껴져서입니다.

붉은 노을과 함께 커피잔을 들었습니다. 그날도 하느님께 뭔가 잔뜩 이르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름 분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하느님 뜨락에서 우리 신자들이 다 모여 같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수많은 종류의 찻잔을 들고, 그래서 그분과 어깨동무하고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천국이 별것이겠습니까? 하느님과 친구 되어 차도 마시고 소주도 한 잔 마시면서 이를 것 다 이르고 가슴 속 응어리를 다 풀어내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삶을 넘어서 있는 영원의 시간에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우리 모든 장지동본당 신자들이 하느님 뜨락에서 인생의 찻잔을 들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그 모습…. 주님,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