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1-04-13 수정일 2021-04-13 발행일 2021-04-18 제 324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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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도직으로 복음적 삶 증거
1937년 한국에 첫 진출
50년 만에 관구로 승격
전국 17개 수도원·3개 분원

2017년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아 산청 성심원에서 열린 돗자리 총회 중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작은 형제회 제공

프란치스코 성인의 선종과 시성 후 수도회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 많은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수도회가 점차 커짐에 따라 순례자와 나그네로 살아가는 탁발 영성으로의 복귀 문제도 대두됐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리와 통합을 거쳐 현재의 세 개 수도회 즉 ‘작은 형제회(OFM)’,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OFM Conv)’,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 Cap)’가 생겨났다. 작은 형제회는 현재 120여 개 나라에서 약 1만 3000여 명 회원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으로 사도직을 펼치고 있다.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14일 일본에 파견돼 있던 캐나다 성요셉 관구 소속 도요한(Jean-Joseph Deguire), 배쥐스탱(Justin-M.Bellerose) 선교사가 부산에 입국하면서 이뤄졌다.

대전에 첫 수도원을 설립하고 1938년 12월 15일 축복식을 거행한 이들은 대전 목동본당 사목을 하면서 성소자 발굴과 양성, 유치원과 주일학교 사목에 주력했다. 또 재속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해 지도했다. 추가로 회원들이 더 파견돼 활동을 벌였으나 1941년 일본과 캐나다의 전쟁으로 전쟁포로가 되기도 했고, 6·25전쟁 발발로 한국에서의 존립이 끊기는 사태도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배쥐스탱 수사는 다시 한국에 입국해 대전 수도원을 복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이탈리아 선교사들의 진출로 남쪽 지방에서 본당 사목과 사회사업이 시작됐다.

1963년 이 아폴리나리스 수사가 한국의 총장대리(Delegatus Generalis)로 임명돼 입국한 후 서울 정동에 수도원이 설립됐고, 이어서 스페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주문진본당 중심으로 사목을 벌였다. 멕시코 선교사들도 전주교구에서 활동을 준비했다.

한국 총장대리구는 1969년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회원들을 통합해 준관구가 됐으며 1987년 12월 10일 마침내 한국순교성인관구로 승격됐다.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인 회원들의 활동은 주로 본당과 사회복지 시설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점차 교육, 출판, 선교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2017년 한국 진출 80주년을 기념한 한국관구는 전국에 17개 수도원과 3개 분원을 두고 있다. 전국 5개 본당과 2개 준본당, 1개 공소에서 사목을 펼치고 있으며 노인복지시설, 노인요양원, 지적장애인 등을 위한 사회복지 사업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외 탈북이주민 생활시설, 교육센터, 피정 시설 운영 등으로 복음적 삶을 증거하고 있다. 위원회들을 중심으로 한 탈북이주민 사목과 ‘정의·평화·창조질서 보전’ 활동, 프란치스칸 연구소를 통한 다양한 학문 연구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이주민 사목 등도 전개하고 있다. 회원 수는 초기 양성자를 포함해 167명이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