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14. 세례성사②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세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시작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7~1222항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
이기적인 본성의 삶에서 탈출
하느님과 이웃 사랑 목적에 둔
삶으로 전향하기 위한 결단

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 트루먼이 바다 세트를 걸어 밖으로 나가기 전 장면. 세례는 세상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트루먼 쇼’ 장면 갈무리

영화 ‘트루먼 쇼’(1998)에서 주인공 ‘트루먼’은 자신도 모른 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중계되는 세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갑니다. 트루먼을 제외한 그 섬의 모든 사람은 연기자들입니다. 직장 동료들과 친구는 물론이요, 심지어 부모와 아내까지도 연기자입니다.

그런데 트루먼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대학 동창인 ‘실비아’는 직업을 잃을 각오하고 트루먼에게 보는 모든 것이 가짜라고 말해줍니다. 그 진실을 말해줌으로써 실비아는 직업을 잃게 됩니다.

트루먼은 그 말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흐릅니다. 하지만 트루먼은 갑자기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잡지에 나온 여러 여자의 얼굴을 조각조각 찢어가며 실비아 얼굴 모자이크를 만듭니다. 이런 노력은 진리를 말해 준 유일한 이를 향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섬으로 되어있는 세트장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감독이 트루먼 마음 안에 물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자신과 함께 물에 빠진 아버지가 돌아가신 기억이 심겨 있어서 물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은 배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바다를 건넙니다. 실비아가 말해 준 진실을 위해 두려움의 바다에 뛰어든 것입니다. 감독은 커다란 파도와 바람으로 트루먼이 포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트루먼은 산타 마리아호에 자신을 묶고 한 방향으로만 계속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세트장 마지막 부분에 다다릅니다. 하늘이 아닌 하늘이 칠해진 벽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마치 물 위를 걷듯 바다 세트를 걸어 밖으로 나가 실비아를 만나러 갑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는 아기가 참 인생을 살려면 그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동시에 사는 세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누구나 두려움의 바다를 건넙니다. 두려움은 믿음으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하십니다. ‘세례’를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 세례는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곳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세상 지배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기 전에 우리가 속해 있는 구체적인 세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탈출기에서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교리서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참으로 해방”되는 것을 “세례로 이루어지는 해방”(1221)이라고 가르칩니다. 자아로부터의 탈출 없이 죄로부터의 탈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15)라고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자아의 압제로부터 탈출한 “세례받은 새 백성의 예표”(1221)입니다.

따라서 홍해는 “죽음을 상징”하고 “십자가의 신비”(1220)를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1218)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세례가 혼돈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물과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로 재창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하느님은 노아 때의 “홍수를 통하여”(1219) 또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너”(1222)는 사건으로도 세례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바로 세례받은 백성, 즉 ‘교회’를 상징하고(1094 참조), 요르단강을 건널 때의 ‘계약의 궤’는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만이 교회의 존재 원리여야 함을 알려줍니다.

이렇듯 세례는 이기적인 본성의 삶에서 탈출하여 이전 본성을 십자가에 죽이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의 삶으로 전향하기 위해 교회에 머무는 삶을 살겠다는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