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토마스’를 자비롭게 품어주세요

장재봉 신부(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7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 4,32-35) 제2독서(1요한 5,1-6) 복음(요한 20,19-31)
불완전한 믿음으로 가득 차
주님 부활도 의심하던 토마스 제자들은 그에게 자비 베풀며 사랑과 헌신으로 다독였네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두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세상에 “큰 은총”을 누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특히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길 것“을 천명하는데요. 모두 그분의 자비로우심 덕분에 누리는 축복이기에 오늘 교회는 주님의 자비심을 높이 기리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냅니다.

부활 제2주일을 특별히 자비 주일로 제정하게 된 배경은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님께 발현하시어 부활절이 지난 다음 주일에 온 교회가 자비심 축일을 기념하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당부하신 까닭입니다. 저는 자비심 기도서를 처음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하는데요. 한창 패기 넘치던 어린 사제 시절, 어디를 가던 그곳 성당을 찾아 조배를 드린 후에 일정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낯선 성당 조배실에서 생소한 기도서를 만났는데요. 기도서에 담긴 주님의 고백이 어찌나 절절한지 코가 시큰하고 눈이 젖어 들었지요. 약속시간이 임박한 탓에 얼른 기도문을 옮겨 적고 출판사를 확인한 후에 조배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2000년 교황님께서 자비심 축일을 제정하여 선포하셨을 때, 큰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제 좁쌀만 한 공로가 보태졌다는 자부심이 솟구쳤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비심 축일이 어서 제정되도록 기도를 바치며 지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신이 납니다. 주님께 ‘헤헤’하며 실없는 웃음도 날리고 성모님께 ‘아시지요? 히히~’대며 모자란 아들의 헤벌쭉한 모습을 보이게도 됩니다. 그때 구입한 기도서가 낡아빠졌지만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유일 겁니다.

조반니 디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티아니 ‘성 토마스의 의심’(1388년)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상황을 살피면 토마스에게 그 ‘여드레’는 정말 힘들었을 것만 같습니다. 그날 토마스는 동료들의 들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홀로 왕따 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도 같고 그래서 더 퉁명스럽게 대했을 것도 같으니까요. 그럼에도 동료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머물러 지냈다는 게 대단하다 싶은데요. 어쩌면 토마스는 그 여드레 동안에 자신이 함부로 지껄인 말을 통회하며 홀로 자신의 허물에 가슴을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통회가 있었기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놀라운 지혜의 고백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하필 토마스 사도가 없는 틈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까닭도 그분의 정겹고 다감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섭리라 싶은데요. 그렇게라도 당신의 자비하심을 제자들에게 ‘한 번 더’ 일깨우려 하심이라 생각되는 겁니다. 때문에 그날 토마스가 진짜로 주님 상처에 손가락을 들이댈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나아가 동료들의 말을 진심으로 의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믿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동료들의 기쁨에 동조하지 못했던 토마스의 좁은 속내가 오히려 정겹고 고마운데요. 지금 당장,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갖은 의문과 의심들이 똑 닮았으니까요. 우리도 수없이 하느님의 불공평하심에 불만을 품고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의심하는 불완전한 믿음의 ‘전과자’들이니까요. 신앙을 팽개치고 싶은 의구심에 영혼이 앓기도 하고 믿음에 한기를 느끼는 것도 남 얘기가 아니니 말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도무지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갑갑해하기 일쑤이고 나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마침내 이도 저도 성에 차지 않고 이웃의 기쁨마저 눈꼴 사납고 어느새 성당은 외롭고 속상한 곳이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뿐인가요?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상의해 봤자 고작 “하느님만 보고 사람을 보지 말라”느니 “신앙을 재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뻔한 대답만 돌아오니, 바짝 약이 오릅니다. 결국 “나도 그런 거, 충분히 알거든” 싶은 마음에 토마스처럼 팩 토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돼먹지 않은 말에 “뭔 말을 저리 막되게 지껄이냐?”며 ‘몹쓸 인간’ 취급을 했다면 토마스는 그들 곁에 머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통하는 저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생각에 열불이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법도 하니까요.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미심쩍은 마음을 품어주고 다독이며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자란’ 토마스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고 끼리끼리 수군대지도 않고 더 다정하게 토마스를 대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날 토마스의 불평을 ‘틀렸다’ 하지 않고 ‘다르다’고 구별하지 않았던 열 제자의 사랑과 헌신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말씀의 심지라 싶습니다. 그 배려가 토마스의 발길을 꼭 붙잡았다는 고백이라 듣습니다.

자비 주일, 주님께서는 오늘, 세상을 두려워하며 희생을 미루고 사랑하기 어렵다며 마음을 꽉 잠그고 있는 우리에게 이르십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자유하라 하십니다. 부활인답게 어느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라 하십니다. 설사 ‘참’을 얘기해도 ‘제멋대로’ 판단하며 토라졌던 토마스를 품었던 열 제자의 넉넉한 마음을 닮아 살으라 하십니다. 하여 모두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한마음으로 찬미할 그 날을 고대합니다.

장재봉 신부(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