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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머피의 법칙

채정순(아녜스·대구 두산본당)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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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도로 불어나자 나는 계속되는 불신감으로 타인을 경계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외출하고 올 때마다 휴대폰을 알코올 솜으로 구석구석 닦아선지 그만 고장이 났다. 소통을 담당하는 생필품이라 지체없이 서비스센터로 향했다. 도시철도 역에 도착해 교통카드를 단말기 바닥에 닿지 않게 체크했다. 띄운 공간이 높았는지, 들어가려 하니 통로 끝 양쪽에 있는 구조물이 날개 모양으로 튀어나와 나를 저지했다. 때마침 열차가 도착한다는 신호음이 울려 얼른 뒤로 물러나서 다시 체크하고 열차에 올랐다.

목적지에 내려 출구 체크를 하려는데 ‘승차할 때 확인이 안 된 카드’라는 안내 음성과 함께 또 날개가 막아섰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고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날개를 타 넘고 나와버렸다. 꺼림직해서였는지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굴러 계단 끝자락에 메다 꽂혔다. 안전사고는 정신이 흩어졌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 절감하니 섬뜩했다. 계단 모서리에 손목이 긁혔고,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머리가 아팠다.

기분은 우울했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어서 예정대로 서비스센터에 갔다. 휴대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센터 직원이 기계에 물이 들어가서 고장이 났다며 부속을 갈아 넣으려면 얼마간의 돈이 드니 고칠 건지 새로 살 건지 결정하라고도 했다.

의논할 상대를 찾아 딸네 집으로 향했다. 딸 아파트에 도착해 승강기를 타려고 보니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비좁은 공간이 코로나19를 경계해야 하는 요주의 장소라는 말이 떠올라 그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되어 이용했다. 그런데 11층까지 잘 와서는 엘리베이터 문이 꽉 다문 조개 입처럼 열리지 않았다. 황당해 비상벨을 사정없이 누르니 다행히 비상벨 저편에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업체에 전화하겠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파트 관리직원은 내가 당황할까 봐 엘리베이터 문 앞에 와 있었다. 업체에서 보낸 기술자가 부지런히 오고 있다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고소공포증과 폐쇄공포증을 동시에 가진 나로서는 이 미증유의 사건 앞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또 십여 분이 되어 갈 때 “어르신 고생하셨다”는 반가운 음성과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가공할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풀어진 긴장감으로 딸네 거실 소파 위에 털썩 누워버렸다. 고장난 휴대폰에 대한 걱정은 이에 비하면 행복한 고민이었다. 엘리베이터 때문에 생긴 가슴의 메케함이 팔다리로 퍼져나가 사시나무인 양 떨렸고, 설상가상으로 이제껏 참아왔던 팔꿈치와 머리의 아픔도 쿡쿡 쑤시며 제 존재를 드러냈다.

더 힘들고 무서운 것은 엘리베이터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그 물건은 이제 겁이 나서 쳐다보기도 싫은데 그런 이동수단을 벗어나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었다. 딸네는 11층, 내 집은 7층이니 주중엔 외손자를 보러 다니는 처지라 만약에 걸어서 다닌다면 걸리는 시간은 차치하고 얼마 가지 않아 큰 사달이 날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이 모든 것이 무단히 찾아온 코로나 탓이었다. 역병에 맞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며 건너려는 처세술로만 임하다 우환을 얻은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코로나는 병든 지구가 지독한 바이러스를 내놓을 미래를 예상한 하느님이 내린 일종의 예방접종일 수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전파력은 빨라도 치사율은 낮으니 말이다. 약간의 희생은 감수하더라도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을 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케 하려는,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백신일 수도 있다. 그 깊은 뜻도 모르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코로나19라는 괴물이 아니었으면 휴대폰이 고장 날 리도 없고 교통카드도 제대로 찍었으며 문제 일으킬 승강기에 타지도 않았을 터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나의 경계심으로 인해 오히려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는 뭉그적거릴 수가 없어 분연히 일어나 딸에게 조언을 받고, 눈을 질끈 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휴대폰을 고쳤다. ‘눈이 빠져도 이만하기 다행’이라 읊조리는 옛 사람들의 말처럼, 살 길은 그 길밖에 없기에.

채정순(아녜스·대구 두산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