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 / 김지훈

김지훈(안토니오) 시인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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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어디 계십니까. 여섯 살, 만으로는 4년 5개월 된 딸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저는 자주 주님을 의심하고 잊곤 합니다.

주님, 밤새 내린 눈이 봄의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제 곧 봄바람이 불고 제비가 날고 망울망울 터지는 꽃들의 함성소리가 들리겠지요. 언제부턴가 서로 잘 만나지 못하고 잘 나가지 못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코로나 감염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제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가 바람의 기도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자만에 빠진 인간은 세상 만물의 근원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임을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감염원도 세상 만물 중 하나인데 마치 그것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앗아 갔다고만 생각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마스크 착용이 당연시 된 아이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우리는 자주 주님을 잊고 때로 주님을 탓했습니다.

주님,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아파트를 오르내릴 때면 어여쁜 딸아이가 아빠 안아줘 하고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밉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아빠 힘들지?”하며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어린 친구의 목소리에 기운이 나곤 합니다. 주님, 그 눈빛 속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가만히 묵상하며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분. 고단한 삶 속에서 제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말하고, 찾는 행위도 기도의 형식이란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주님, 들리십니까. 불러도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 아쉬움은 감사와 만족보다 욕심에 길들여진 탓일 것입니다.

“저 강을 건너기 위해 내가 너를 업고 여기까지 왔다. 보라! 여기 바다까지 오는데 누가 너의 눈과 발이 됐는지를.”

주님, 며칠 전에는 성당 십자가를 배경으로 딸아이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조각을 하고 새기고 떠올립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로서 보이지 않는 것의 정체를 믿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문득, 봄꽃처럼 피어난 딸아이의 미소 띤 얼굴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사랑하면 보이고, 보이면 믿게 된다는 것. 주님을 보는 눈은 육안이 아니라 신앙의 심미안이란 사실을! 이 기쁨, 형제자매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찰칵, 윙크를 하는 딸아이의 눈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달이 뜨고 내일의 태양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 사이,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긴긴 겨울이 잠 깨어 우리의 꿈이 아롱아롱 피어나는 봄날입니다. 만삭, 달처럼 빛나던 아내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비로소 무거움을 벗고 밝은 미소를 머금게 되었습니다.

둘째에게는 모든 게 신기하게 보이고, 새롭게 들리겠지요. 모체에서 떨어져 태초의 무선통신이 시작된 배꼽은 세상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고통의 신비겠지요. 아무도 배꼽의 쓸모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무렵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이 흔적은 유일무이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계시겠지요. 더 이상 흔적이 아닌 아름다운 무늬겠지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는 태초의 음악이겠지요.

에스프레소빛 하늘이 아메리카노 경계로 번질 때, 멀리 어치 울음소리 성당 종소리에 입맞출 때, 두 손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첫째와 둘째, 아내와 함께 감사와 기쁨의 노래를 불러 봅니다. 주님, 우리 안에 언제 오셨습니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훈(안토니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