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다시 아나빔처럼 / 박천조

박천조(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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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북쪽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비난, 그리고 탄도미사일 발사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수립에 영향을 주기 위한 ‘단발성 행동’으로 이해합니다만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아닌 듯합니다.

이미 북은 2018년, 2019년 미국과의 대화 결렬 후 2020년 1월 정면돌파전을 선언하며 자립경제노선을 표방했습니다. 관계개선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국제사회 제재를 전제로 한 방향 수립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쪽은 각종 신형전술무기에 대한 시범사격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 1월 있었던 노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는 핵무기 고도화 선언을 통해 ‘초대형 핵탄두, 1만5000㎞급 대륙간탄도미사일, 중형잠수함 및 핵잠수함, 수중·지상발사 고체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중장거리 순항미사일, 군사정찰 위성’ 등 연구하고 있거나 개발 중인 무기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우리에 대해서는 조건부 관계개선을, 미국에 대해서는 ‘강대강 선대선’(强對强 善對善) 입장을 밝혔습니다. 새로이 수립한 경제발전 5개년 전략도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기본종자’로 삼은 점에서 그 방향이 눈에 보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저는 성경 속의 ‘아나빔’(Anavim)들이 생각납니다. 성모님의 마니피캇(Magnificat)에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키며 하느님 말씀을 따라 가난하게 살던 아나빔들이 나옵니다. 아나빔들은 재물도, 권력도, 재주도 없었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하느님밖에 없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마음을 견결히 지키면서 우리 신앙의 토대가 돼 왔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내적으로는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아나빔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적 상황, 즉 한반도 전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로지 하느님만 믿고 이겨내 왔던 아나빔의 자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평화와 화해를 향한 기도와 실천은 종종 현실적인 주장 앞에 무기력해지고 맙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철 없는 소리들 하고 있네.” 그러나 우리가 갈구하는 신앙 속의 진리는 ‘평화’이고 ‘화해’이기에 좌절하지 않고 찬미와 감사로 끊임없이 ‘아나빔’처럼 따르고 싶습니다.

절망 중에도 희망을, 슬픔 중에도 기쁨을, 어둠 중에도 빛을, 죽음 중에도 생명을 살았던 아나빔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2018년 4·27 판문점선언 같은 평화의 모습도 아나빔의 마음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의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매일 밤 9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주모경으로 마음을 다져 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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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조(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