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장지동성당 연가(牆枝洞聖堂 戀歌) 8 - 다시 입던 옷을 빨아입으며 / 정연혁 신부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1-04-06 수정일 2021-04-06 발행일 2021-04-11 제 323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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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는 부활 제2주일을 ‘사백주일’(卸白主日)이라고 불렀습니다. 흰옷을 벗는다는 뜻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에 세례받은 분들이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흰옷을 세례 때 받아 입고 한 주간을 지내다가 이날 옷을 갈아입었다는 데서 기원합니다. 부활 팔일 축제 기간과 함께 발달한 전통인 듯 여겨집니다. 제가 신학생 때 연세 많으신 본당 신부님은 “이 전통이 글을 많이 모르던 당시 서양에서 그 옷을 본당에 걸어 놓고 세례 문서를 대신하는 풍습도 가미됐다”고 하셨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가난하던 시절에 옷 한 벌 맞춰 입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축제를 마치고 나서 다시 입어야 할 옷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전에 입던 옷이었겠지요. 평범과 가난이, 그리고 삶의 무게와 고통이 배어 있는 그런 옷이었겠지요.

우리 본당 신자들을 봅니다. 그냥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와 다르지 않게 본당 아이들 눈을 보면 하늘의 별이 하나씩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은 삶이 이유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청소년들을 보면 어른이 된 그들이 보입니다. 무뚝뚝한 사내아이들이 저의 애교에 견디다 못해 한 번 피식 웃어줄 때, 미래의 듬직한 아버지가 보입니다. 여학생들이 서로 몰려다니며 웃고 조잘대고,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가는 뒷모습을 보면 뭘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듭니다. 청년들에게서는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공부하고 직장에서 시달리며 살아가고 그 와중에 인생의 미래를 계획하고 힘들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젊은 엄마 아빠들이 힘들게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꿈과 다른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가정을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젊은 요셉과 마리아를 만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미래 세대를 위해 삶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보면, 삶은 어떻게 살았어도 넉넉한 우리의 집이었음을 배웁니다. 이렇게 우리가 평범히 살아가는 일상, 삶과 사랑이 있는 일상은 어제와 늘 다른 오늘입니다. 비록 흰옷을 벗고 입던 옷을 입어도. 우리의 오늘은 영원을 품고 있는 씨앗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변함없고 삶의 자리들은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부활 안에서 알게 모르게 흰옷을 벗고 오늘의 옷, 삶의 옷을 다시 입습니다. 부활한 마음으로 깨끗이 빨아 입습니다. 마치 거룩한 변모 때 흰옷을 벗고 입던 옷을 다시 입고 예루살렘이라는 오늘로 들어가 죽음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한 스승처럼. 그래서 주님께서 살아내신 그분의 인생처럼 우리가 사는 인생이 영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분처럼 우리의 삶도 비록 각자 다른 모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르심의 길이기에.

힘들어도 다시 옷을 빨아 입으려는 우리 신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렇게 채워가는 일상이 인생이 되고, 그 인생 모두가 부활의 과정임을 믿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안에서는 늘 그럴 것임을 믿습니다.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