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 방북, 어렵지만 희망한다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1-03-30 수정일 2021-03-30 발행일 2021-04-04 제 3238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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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화해 여정에 ‘평화의 사도’ 첫걸음 내딛게 되길
방북에 대한 확고한 의지 표명 
분쟁의 땅에 희망 전하려는 행보 
최근 이라크 순방에서도 알 수 있어
선교 목적 넘어 중재 외교 전개
한반도 평화 정착 위한 가교 역할
정부와 한국교회 다각적 노력 절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미 방북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이라크 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황님은 평화의 사도로서 어디든 방문할 준비가 돼 있는 분입니다. 언젠가는 교황님의 방북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인 염수정 추기경은 가톨릭신문에 교황 방북에 대한 희망을 표시했다.

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역시 같은 기대를 피력했다. 이 주교는 “교황님께서는 기회가 될 때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향한 당신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 주셨다”며 “최소한의 여건만 마련된다면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교황님의 의지는 확고하다”고 말했다.

■ ‘소노 디스포니빌레‘

교황 방북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교황은 일관성 있게 방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 결정적인 자리가 2018년 10월 18일이었다. 유럽 순방에 나선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이 교황을 독대했다. 예정된 30분을 훌쩍 넘긴 뒤 서재를 나선 문 대통령의 표정은 환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 의사를 전해 들은 교황은 “초청장을 보내 주면 갈 준비가 돼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교황의 응답을 정확한 이탈리아어로 확인하니, “소노 디스포니빌레(Sono disponibile)”였다. 영어로 “I am available” 정도로 이해되는 이 말은 ‘기꺼운 승낙’의 뜻을 갖는다. 예컨대, 낯선 오지로 파견을 명받은 선교사가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기꺼이 순명할 때, “소노 디스포니빌레”라고 응답한다.

■ ‘하노이 노딜’로 무산

이백만(요셉) 전 바티칸주재 한국대사에 의하면, 교황님의 ‘소노 디스포니빌레’ 이후 교황청과 북한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교황 방북을 염두에 둔 듯한 움직임들이 포착됐다고 한다. 교황은 2019년 1월 7일, 교황청에 파견된 외교관들을 접견한 신년 하례 자리에서 “한반도에서 긍정적인 신호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백만 전 대사에 따르면, 교황은 주요 참모들과 ‘북한 방문’을 놓고 토론을 했다. 추진과 신중한 태도를 주장하는 모든 의견을 경청한 뒤, 말했다. “나는 북한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준비 잘 하시길 바랍니다.” 이로써, 교황은 방북에 대한 모든 논의를 정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28일,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하노이 노딜’(협상 실패)은 4개월여에 걸친, 뜨거웠던 ‘교황 방북’의 열기를 일거에 잠재웠다.

■ 방북, 불씨는 살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2020년 11월 12일, 이탈리아 일간지 일 메사제로(il Messaggero)는 코로나19 이후 교황의 유력한 해외 방문국에 북한을 포함시켰다. 이에 앞서 10월 23일 이백만 전 대사가 이임 인사차 교황을 알현했을 때, “‘소노 디스포니빌레’가 지금도 유효합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교황은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한국민들은 교황께서 남북한을 함께 방문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Vorrei andare(I would like to go)”(나도 가고 싶다)라고 답했다.

‘교황 방북’ 성사의 최대 관건은 역시 교황이 얼마나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가가 아닐 수 없다. 소외된 이들과 분쟁의 땅에 평화를 선물하려는 교황의 의지는 이라크 방문에서도 확인된다. 교황 자신의 건강 문제, 코로나19, 그리고 테러와 전쟁의 위험 등으로 이라크 순방 역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위협과 도전들을 넘어, 교황은 이라크를 방문해 전쟁을 이기는 평화, 증오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설파했다.

2015년 1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스리랑카 마두의 묵주기도의 성모 성당 방문 중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있다. CNS 자료사진

■ 교황청의 중재 외교

교황 방문은 단지 가톨릭이라는 한 종교의 수장이 선교적 목적으로 수행하는 종교적 행보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력이나 군사력도 없이, 오직 십자가와 묵주만으로 무장한 교황청의 외교적 영향력은 강대국을 능가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소와 핵 전쟁 저지(1962년), 폴란드 민주화 및 공산 정권 붕괴(1980년대), 유럽 연합 출범(199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화해(2014년) 등 굵직한 세계사적 변혁의 현장에는 항상 교황청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었다.

특히 역대 교황들의 쿠바 사도적 방문의 사례는 이를 더욱 여실히 보여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8년 1월 쿠바 방문 도착 연설에서 “쿠바는 세계로, 세계는 쿠바를 향해 문을 열라”고 촉구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쿠바식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과 미국의 대쿠바 무역 제재 해제에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주장도 적극 지지했다. 결국 2015년 쿠바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특히 교황은 양국 대표단을 교황청으로 초청, 외교 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 10월, G20 정상회의에 주목한다

최근 국내외 언론에서는 교황 방북 가능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특히 이백만 전 대사는 교황 방북 성사를 위한 여건이 무르익었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한국 정부와 한국천주교회의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전 대사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달리 국제 평화와 가톨릭 사회교리적 정책 기조에 있어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역시 투철한 가톨릭 신자로 평가되는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첫 통화가 ‘가톨릭’과 ‘교황’을 주제로 했다는 점은 향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의 역할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다고 이 전 대사는 주장했다.

이 전 대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는 10월 로마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문 대통령,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외교적 만남의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그리고 이 만남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다시금 결정적으로 추동하는 계기로 이끌기 위해서 한국 정부와 교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 정부와 교회 모두 외교적 노력 기울여야

염수정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세계의 갈등을 해소하는 ‘중재 외교’를 적극 전개하고 계시고, 특히 한반도 평화의 가교 역할에 대한 의지를 항상 보여 주셨다”며 “교황님의 방북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와 노력만으로도 이는 한반도 평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 방북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요구된다. ‘사도적 방문’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지에 교회가 존재하고 성직자가 상주해야 한다. 혹은 북한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악용될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모든 우려를 불식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이기헌 주교는 “남북 관계는 현재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면에서 교착 상태”라며 “교황 방북은 남북 관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에도 더 이상 바람직한 것이 없을 정도로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교는 “교황과 보편교회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을 지원해 줄 것이며 한국 정부 역시 교황 방북을 포함한, 교황과 교회의 평화 중재 노력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염 추기경 역시 “한국 정부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어떤 상황에서도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교회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한과 교황청의 노력을 지지하며 평화의 도구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노이 노딜’로 모두가 실망에 빠졌던 2019년 6월 25일, 당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기헌 주교는 담화문을 통해 “우리는 이미 시작된 평화의 길을 포기할 수 없다”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황님의 방북을 기원하면서 민족의 화해를 위한 우리의 열망을 잊지 말 것”을 호소했다. 이 호소는 현재도 유효하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