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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6) 최양업, 서품받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3-23 수정일 2021-03-24 발행일 2021-03-28 제 323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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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인사제 탄생 위해 국내외 수많은 기도와 지원 모여
특유의 재능과 덕행으로
기대 한몸에 받은 최양업 신부
프랑스 전역 성소후원 활발
조선 신자들도 목숨 걸고 활동
선발된 신학생 유학 지원 힘써

우리나라 첫 방인사제의 탄생,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탄생은 주인공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공적이 주목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의 탄생이 있기까지는 김대건과 최양업 뒤에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원한 수많은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잘 조명되지 않는 듯하다. 최양업이 서품을 받던 그 시간에 드러나지 않게 성소를 후원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상하이교구 주교좌쉬자후이(徐家匯)성당. 최양업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 사제서품에 대한 간절함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

최양업은 부제품을 받은 지 5년 만인 1849년 4월 15일 당시 중국 강남교구장이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최양업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제로 서품된 소감을 전했다.

사제서품은 최양업에게도 더 없는 감격이었지만, 최양업의 서품을 간절히 기다리며 성소를 후원하던 이들에게 역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1843년 6월 프랑스의 데쥬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덕행과 재능으로 조선에 큰 희망이 되고 있는 조선인 신학생으로 이름은 최(양업) 토마스”라면서 최양업의 사제서품에 얼마나 큰 희망을 걸고 있는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최양업과 동행하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는 최양업의 서품을 마치고 서둘러 “마침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서품됐다”는 내용만을 담은 짧은 편지를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그 이상의 다른 소식을 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선교사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것이다. 최양업의 스승들은 그만큼 최양업이 서품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프랑스 전역 신자들의 기다림이기도 했다.

■ 프랑스 전역에서 모인 성소 후원

사제 한 명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후원이 필요할까. 오늘날 사제 양성과정이 대학·대학원에 걸친 7년 과정임을 생각하면 상당한 금액의 학비를 예상해 볼 수 있다. 게다가 최양업의 수학기간은 13년. 마카오, 상하이, 만주지역을 비롯한 중국 곳곳과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 등을 이동하며 유학생활을 했다. 거기에 사제가 된 최양업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입국시도를 하는 중 이동과 체류 비용을 더하면 오늘날 사제를 양성하는 것보다도 더 큰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학비와 생활비, 물품구입비 등 김대건과 최양업이 사제로 양성되기까지 필요한 지원은 어디서 왔을까.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은 전교회 이사회가 내게 5600프랑을 기부했다는 사실을 방금 알려줬습니다. (중략)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걸작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된) 선교지들의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전교회(La société Propagation de la Foi)의 연보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 인사를 보냈다. 전교회는 프랑스교회 전역에 지부를 두고 선교사들과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던 단체다. 특히 1822년 설립 이래 파리외방전교회를 적극 후원해 왔다. 김대건·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이 된 1836년부터 사제가 되기까지도 전교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김대건·최양업의 양성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전해 오는 기도와 후원이 든든한 뒷받침이 된 것이다.

장동하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는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프랑스교회의 재정지원 연구」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장 중요한 설립목적 가운데 하나는, 선교사들이 파견된 지역의 신자들 가운데에서 성소자를 뽑아 성직자를 양성해 지역교회를 일으켜 세우게 함으로써 선교지역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라며 “한국천주교회 역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착해 선교를 시작하는 초기부터 전교회의 절대적 후원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청주교구 양업순례단이 2018년 10월 14일 전남 곡성 옹기점 터를 순례하고 있다.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지원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청주교구 양업순례단 제공

■ “조선의 큰 희망”

선교사들, 프랑스의 수많은 신자들도 김대건과 최양업의 사제서품을 기다려 왔지만,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방인사제의 탄생을 염원했던 것은 조선교회 신자들이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에서 “지금까지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사람은 모방 신부로 알려져 왔다”면서 “그러나 모방 신부는 19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했고, 따라서 한 달 만에 교우들의 실정을 파악하고 신학생을 선발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모방 신부의 신학생 선발 이전에 조선 신자들이 이미 신학생 선발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36년 모방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지도부에 보낸 서한에서 “교우들은 제가 약간의 소년들을 공부시키고자 하는 것을 알고 두 사람(최양업과 최방제)을 보냈다”고 신자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이 선발됐음을 알렸다.

김대건·최양업의 유학기간에도 조선 신자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학생들을 지원한다. 조선 신학생들이 유학을 가기까지 여정에는 정하상(바오로)를 비롯해 조신철(가롤로), 이광열(요한) 등 신자들이 중국 국경까지 동행했다. 또 조신철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의 조선교회 밀사들은 중국을 오가며 조선 신학생들의 편지를 운반하기도 했다. 부제가 된 김대건이 조선에 입국하고 다시 중국을 향할 수 있도록 보필한 것도 현석문(가롤로), 이재의(토마스) 등의 신자들이었다. 박해 중 신학생들을 지원하는 일은 사실상 목숨을 건 활동이었다.

우리나라 첫 방인사제 탄생은 프랑스교회의 후원,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목숨을 건 활동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한 명의 사제가 탄생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따랐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사제를 양성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성소자 감소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성소후원금도 감소하고 있어 오늘날의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탄생을 위한 신자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서울대교구 성소국 차장 최요안 신부는 “성소가 심어지고 자라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해 그 이후로도 한국에 많은 신부님들이 탄생한 것은 그 뒤에 기도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며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관심 가져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중국 상하이 쉬자후이 성당

중국 상하이교구 쉬자후이성당은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은 이후 신학공부를 하며 머문 장소다. 당시 쉬자후이성당에는 예수회 신학원이 있었는데 최양업은 사제서품을 기다리며 이곳에 머물렀고, 교회사 학자들은 최양업이 이곳 쉬자후이성당이나 장쟈루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