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77) ‘진짜… 십자가의 길’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3-23 수정일 2021-03-23 발행일 2021-03-28 제 323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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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 동안, 심원공소 식구들과 ‘사랑과 구원의 십자가의 길’을 금요일 마다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면서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몇 시에 하면 좋을까, 주송은 누가할까, 그리고 행렬용 십자가는 어느 분이 잡을 것이며, 십자가 옆에 촛대잡이는 필요할까?’ 등이었습니다.

공소 식구들과 상의 끝에 ‘십자가의 길’은 저녁 7시에 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동안 행렬용 십자가는 공소에서 가장 젊은 사람인 ‘나’,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신부님이 한 주씩 교대해서 잡기로 했습니다. 주송은 구역장님과 반장님이 한 주씩 교대로 하고, 촛대는 갖고 있지도 않지만, 80대인 어르신에게 ‘촛대잡이’를 부탁할 수 없기에 생략했습니다.

이윽고 금요일 저녁 7시가 가까웠고 나는 수도복을 입고 공소에 들어갔더니, 주송하실 구역장님께서 조용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행렬용 십자가가 있는 쪽으로 가서 나무 봉으로 된 십자가를 움켜쥐었습니다.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지만, 봉이 굵어서 한 손으로 봉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이 정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십자가의 길은 시작됐고 주송자의 선창과 함께 모두가 기도를 바쳤습니다. 나는 행렬용 십자가를 잡고 제대 앞으로 가서 인사를 한 후 제1처 쪽으로 걸어가는데, 가볍게만 보이던 행렬용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행렬용 십자가의 나무 봉이 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두께다보니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는 듯해 더욱 힘껏 움켜쥐려 했더니 몸에도 힘이 들어갔습니다. 제2처, 제3처로 가는데 나도 모르게 행렬용 십자가를 흔들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멀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5처를 지나는데 십자가는 더더욱 무거워졌고, 나는 교우분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십자가 봉 끝을 허리띠에 받쳤습니다. 한 순간 편안했지만, 마스크를 쓴 상태라 숨 쉴 때마다 자꾸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바람에 십자가도 흔들거려 효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서서히 ‘아, 힘들다,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르신들이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비운 마음으로 제7처에 이어 제8처로 이동하는데 순간, 콧구멍 주변이 가려웠습니다. 아마 마스크를 쓴 상태에 숨을 헐떡이다보니, 마스크에 있는 미세한 천에 보푸라기가 일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가려움을 참는데…. 그걸 버틸 수 있었던 건 교우분들 모두가 진지하게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 소리였습니다. 내 뒷머리 쪽에서 들리는 공소 식구들의 십자가의 길 기도 소리는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신 예수님께 죄송하지만, 행복한 천상의 소리로 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제9처부터는 허리까지 욱신거리더니, 제10처로 가면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생각이 내 머리 속으로 치고 들어와 나를 괴롭혔습니다. ‘빨리, 빨리, 빨리 끝나자.’

그런데 놀라운 건, 제11처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기도 내용에 몰입되더니, 제12처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고통을 저절로 묵상하게 됐습니다. 제13처, 마지막으로 제14처가 되면서 주님의 말씀이 내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십자가의 길을 끝내고 힘들지 않은 척하며 교우분들에게 마침 강복을 드렸고, 다시 공소 마당에 나와 어르신들께 ‘좋은 밤 보내시라’고 인사를 드린 후 방에 들어갔는데, 그만!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습니다.

평소 신자분들에게만 십자가를 지고가게 했는데, 막상 사제인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더니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우리 교우분들이 현재 살아내고 있는 삶의 ‘희로애락’ 모두가 진짜 ‘십자가의 길’이 아닐까 … 깨닫게 됐습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