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62) 노란색 트라이앵글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
입력일 2021-03-23 수정일 2021-03-24 발행일 2021-03-28 제 323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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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통해서 이루는 하느님과의 일치
온종일 형제들과 지냈는데도 저녁에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피조물에 대한 흔적과 기억을 사라지게 하시고
한없이 부드럽게 그분 현존으로 우리 집을 가득 채우시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성호를 긋는 모습부터 떠오른다.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숙이신 뒤 아주 천천히 이마부터 십자를 그으실 때는 마치 세상이 멈춘 것 같고, 폭탄이 떨어지더라도 상관 않으실 것 같았다. 얼마나 마음 모으는 데에 익숙하셨는지, 알츠하이머병을 앓으시던 말년에 세면실에 모시고 들어가서 양칫물을 받아 드렸을 때도 바로 그 모습으로 성호를 그으실 정도였다. 당시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우리에게는 기도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일화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런 경건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포콜라레운동에서 무지개색에 비추어 우리 삶을 정돈할 때, 노란색은 하느님과의 일치, 곧 기도와 성사 생활을 말한다. 특히 시련과 상처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며, 형제를 통해서도 그분께 이를 수 있음을 가르쳐 주어서 참 감사하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인터넷을 열어 보니 생신 잔치를 하시는 친구 어머니께 꽃이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비대면 시기라 축하를 드리러 갈 수도 없고 그렇게라도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한 친구는 앓아 누워 있었는데 상태가 어떤지 문자를 보냈더니 한참만에야 답이 오기를, 아직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노라고 했다. 어쩌나, 당장 달려가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12시에는 어린 친구와 산에 오르기로 했고 오후 2시에는 집으로 손님이 오기로 약속된 날인데다가, 멀리서 이미 출발한 그 손님과의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비상수단으로, 나의 수호천사에게 아픈 친구의 수호천사를 도와, 두 천사가 함께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좀 주십사고 청하였다. 친구에게는 오후에 가서 죽을 끓여 주겠다고 문자를 보내고는 어린 친구의 집으로 가기 위해 동산을 하나 넘었다. 묵주 기도 5단이면 가닿는 거리를 걸으며 앓는 친구를 성모님께 계속 맡겨 드렸다. 함께 산으로 오르는 길에 아이는 “그런데요…”,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라며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답을 해 주며 한 시간을 넘게 산길을 걷고 집으로 바래다주자 아이는 활짝 웃는 모습으로 몇 번이나 돌아서서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2시에 도착한다던 손님에게서 고속도로가 막혀서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아픈 친구 생각에 조바심이 났지만 그분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일 터, 알겠다고, 조심하시라고 답을 보냈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한 손님은 서울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선물한 기능성 건강 제품을 전하며 설명을 해 주었는데, 나는 지병이 있으신 형부께도 권하고 싶어서 저녁에 언니 집에서 다시 뵙기로 하였다.

손님을 보내 드리고 서둘러 아픈 친구에게 가면서, 가서 죽을 끓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지나는 길의 죽집을 검색해서 주문 전화를 하고 차를 몰았다. 도착해서 보니 친구는 몸이 부어 있을 만큼 힘든 상황이었다. 그나마 죽이라도 한 끼 먹는 것을 보고는 다시 언니 집으로 차를 몰아 아픈 친구에게 소용이 될 만한 제품도 마련하고, 형부께도 선물해 드렸다. 나에게 선물을 보내 준 친구의 사랑이 나를 거쳐 그렇게 또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형부께 성의를 받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언니와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한참 늦은 밤이었다.

유난히 분주한 하루였는데도, 저녁 기도를 드릴 때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느새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속도로 성호를 긋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끼아라께서 하신 말씀 한 구절을 맛보는 듯했다. “우리가 온종일 형제들과 지냈는데도 저녁에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피조물에 대한 모든 흔적과 기억을 사라지게 하시고 한없이 부드럽게 그분 현존으로 우리 집을 가득 채우시기 때문이다.” 정말 그랬는지, 그날은 ‘하느님, 형제, 나’를 노란색 트라이앵글로 떠올리며 행복한 마음으로 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