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참회하는 평화의 순례자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03-23 수정일 2021-03-24 발행일 2021-03-28 제 3237호 2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에 대한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시작으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대테러 전쟁’의 총사령관을 자처했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한 뒤,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 국민을 해방하고, 중동에 민주화를 확산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라크 전쟁은 분명 정당성에 논란이 있었던 ‘예방전쟁’이었지만, 9ㆍ11 테러라는 충격을 겪은 당시의 미국 사회는 이 전쟁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가 내세운 ‘정당한 전쟁’의 조건들은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충족되지 않았다. 우선 독재자 후세인이 제거된 뒤에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명분은 결국 ‘실수’나 ‘조작’으로 판명됐다. 또 이라크 전쟁은 중동지역에서 자유민주주의나 인권 신장에도 결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수없이 억울한 생명을 앗아간 전쟁은 오히려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극단적인 증오를 키워 낸 것으로 평가된다. 이라크 주민들을 구한다는 전쟁이 그들에게 너무 참혹한 고통을 가져다 준 것이다. 개전 초기 압도적인 미군의 군사력이 승패를 금방 결정했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수십만의 무고한 인명이 더 희생당한 뒤 미국은 2011년에 이라크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새삼스레 종전을 선언해야 했다. 그렇게 미군이 철수한 이라크에서는 기나긴 내전이라는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라크를 방문했다. 당신이 간절히 원했던 여정을 시작하면서 교황은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의 순례자로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위험과 테러 위협도 교황의 의지를 꺾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평화의 순례자’는 이라크 남부 도시 나자프에서 이슬람 시아파 최고 지도자를 만났다. 이 만남은 2000년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만남은 이라크 전역에서 생중계됐는데, ‘참회하는 평화의 순례자’로 자신을 호명하는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다른 믿음을 가진 이슬람 지도자와의 만남이 ‘내 영혼의 유익’이었다고 평가했다. 서방 세계와의 오래된 갈등 속에서 지속된 참혹한 폭력의 경험은 중동지역에서 분노와 보복의 마음을 부추기기 쉬웠다. 하지만, 평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라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은 분명 따뜻한 위로와 평화를 향한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갈라진 적대의 땅에서 평화의 사명을 가진 한국천주교회가 인류의 죄를 참회하는 순례자의 마음을 닮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변화를 다짐하는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화해를 위해 더 깊이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