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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김형태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1-03-23 수정일 2021-03-23 발행일 2021-03-28 제 3237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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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아버지는 나에게 이리 반문하셨습니다. 아마득한 내 고등학생 시절, 아침을 먹던 자리에서 부자 사이에 한바탕 정치토론이 벌어졌더랬습니다. 아버지는 이북 출신답지 않게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고, 아들인 나와 전혀 이견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대안을 두고서였지요. 학생들이 민주 제단에 제 한 몸 바쳐 독재를 타도해야 한다고 내가 젊은 호기를 부리자 아버지는 헤밍웨이 소설 제목 중 ‘종은’을 ‘종을’로 한 글자 비틀어 들고 나오신 겁니다. 당신이 그 소설을 보신 적은 없고 게리 쿠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셨습니다. 영화 속 여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런 멋진 대사로 관객들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지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우리 두 사람 몫만큼 당신을 사랑하겠어요.”(If you do not love me, I love you enough for both.)

소설 주인공은 미국인인데도 타국 스페인에 건너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프랑코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웁니다. 그러다가 종당에는 연인과 동료들을 피신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이 안타까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나에게 던지신 물음,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아버지의 이 무거운 질문에 아직 철이 덜 들었던 나는 씩씩하게 답을 했었지요.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개인이 희생할 수 있는 거라고.

엊그제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요즘 한창 시끄러운, LH공사 직원들이 직무상 얻은 정보를 가지고 땅 투기를 한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답니다. 한두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들도 그런 기회가 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걸 선생님은 왜 묻느냐는 식이었다는 거죠. 잘못된 일이라고 답한 한두 명도 막상 정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자신도 어떻게 할는지 자신이 없다고 대답했답니다.

선생님도 놀랐고 나도 정말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이렇게 된 건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들 잘못입니다. 나름 젊은 시절에는 대의명분을 좇는다며 호기도 부려 보았지만, 차츰 나이 먹어가면서 결국 돈에 굴복하고, 실리에만 눈을 밝히게 된 것이죠. 그저 돈이 제일 중하고, 나, 내 새끼만 잘되면 된다고 살아온 우리 기성세대의 업보입니다.

지난 시절 대의명분은 제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충분한 동기였습니다. 초등학생 때 열심히 읽던 위인전에 나오는 이름들.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 그리고 위인전에는 안 나오지만, 3ㆍ1 운동, 4ㆍ19 혁명, 5ㆍ18 민주화운동 때 자신을 내어던진 수많은 필부필부들. 사실 사람들이 미워하는 ‘빨갱이’들 중에도 정말 사심없이 ‘노동자, 농민들을 위해’ 스러져간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들 중에도 방법론이 우리와 달라서 그렇지 대의명분을 위해 제 삶을 내어놓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이들도 여럿 있습니다.

‘대의명분’. 흔히 동서고금의 많은 야심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포장하려고 끌어다 댄 게 소위 대의명분이었지만, 본시 이 말은 ‘공동선’이나 ‘이타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거였지요. 진화생물학자 도킨스는 ‘이타’가 개체로 볼 때는 자기희생일 수 있지만 실은 종족 전체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유전자가 개체를 조종해 벌이는 이기적 행동이라 했습니다.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타주의’나 ‘공동선’은 인간 종족이 동물 수준에서 그저 개체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해 오다가 이성이라는 자기반성 능력이 생기면서 새로이 나타나게 된 개념이요, 현상입니다. 자기 개체를 넘어서는 것. 불교에선 해탈이라 하고 그리스도교는 구원이라 합니다. 영화 속 ‘게리 쿠퍼’는 스페인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제 목숨을 던짐으로써 ‘나’라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부디 우리 아이들도 오로지 제 앞가림, 제 눈 앞의 이익에만 매달리는 걸 넘어서서 자유로워지기를 빕니다. 그러려면 기성세대인 우리부터 먼저 그리 해야겠지요.

저 종은 누구를 위해 울리는 걸까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