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시기, 사순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입력일 2021-03-16 수정일 2021-03-17 발행일 2021-03-21 제 323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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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제1독서(예레 31,31-34) 제2독서(히브 5,7-9) 복음(요한 12,20-33)
주님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적인 것
이단에서 말하는, 희생과 헌신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어
내 작은 죽음을 통해 조금이나마 하느님 뜻이 이뤄짐을 알아야

제가 사목하고 있는 피정센터는 아주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정 붙여 살아가다 보니 주변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겨울은 그야말로 황량함 그 자체였습니다. 매서운 추위와 강풍, 폭설과 길고도 지루한 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황은 반전됩니다. 잠잠하던 어촌이 역동적인 활력으로 가득 찹니다.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참숭어나 도다리, 우럭이며 놀래미가 다시 돌아와 낚시꾼들을 유혹합니다.

아직 낚시하기엔 이른 계절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운 갯바위로 나갔습니다. 아니라 다를까 역시나였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잔챙이 한 마리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아닌가 보다.’ 하고, 낚싯대를 접으려는 순간, 아주 미세한 입질이 왔습니다. 잽싸게 챔질을 해서 끌어올렸습니다. 잡혀 올라온 녀석은? 복어 중에서도 제일 졸병인 새끼 손가락만한 졸복이었습니다. 꽉 물고 있는 바늘을 조심스럽게 빼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는데, 녀석의 행동이 정말이지 웃겼습니다. 잔뜩 몸을 부풀려 엄청 빵빵해진 것입니다. 나름 저보고 위협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 무서운 고기니 건들지 마라’는 표현 같았습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무섭기는커녕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는 오지 마라’며 저 멀리 던져 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 눈에 복어 새끼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별것도 아니면서 틈만 나면 자신을 있는 대로 부풀리는 모습, 든 것도 없으면서 잔뜩 스스로를 과대포장하는 모습, 회칠한 무덤처럼 속은 심하게 부패했으면서도 겉만 번지르르하게 닦고 있는 모습이 어찌 그리 꼭 빼닮았는지요. 사순 시기가 깊어 가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작은 목표를 세워 실천해 봐야겠습니다. 뻣뻣해진 목이나 어깨에 힘을 빼는 작업, 과대포장을 벗겨낸 후, 있는 그대로의 내 부끄러운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작업, 나는 꽃이요 주인공이 아니라 잎이요 조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작업.

빈센트 반 고흐 ‘수확자와 밀 무더기’(1888년, 일부)

■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입니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 짓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 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착잡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 드리며,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 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뤄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닌다.

‘죽어야만 산다’는 이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면, 심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역설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관건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웃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죽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미는 교만함과 우월감으로부터 죽어야겠습니다. 주님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교만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