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40일] - 다섯 번째 이야기·끝

입력일 2021-03-16 수정일 2021-03-16 발행일 2021-03-21 제 3236호 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드디어 해방이다! 인간이기에 이제 더는 부담감이나 지키지 않았을 때 느끼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에 먼저 환호성을 질러 본다. 다시 좀더 편한 생활로 돌아가겠지만, 그 전과 같은 무심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번 도전으로 그동안 코로나19 혹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척 했던 신앙을 다시 삶의 중심에 두게 됐다. 덩달아 앞으로 삶 속에서 작은 실천이라도 해 나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지난 5주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기자가 늘 지니고 다니는 면 주머니, 접이식 용기, 장바구니.

■ 비닐 안 쓰기

“어디서든 비닐 사용 막아줄 3종 세트, 평생 함께 하기로!”

절반의 성공.

지난 사순 시기 동안 실천했던 비닐 안 쓰기에 대한 기자의 주관적인 평가다.

이를 뒤집어보면 절반의 실패라는 뜻도 되지만 비닐 안 쓰기는 사순 이후에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 면에서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었다.

호기로운 시작과 달리 비닐 안 쓰기는 예상치 못했던 많은 복병과 부딪쳤다.

그 가운데 제일 큰 문제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식품, 특히 가공식품의 비닐재 포장과 소포장, 개별포장이었다. 또한 사순기간 동안 비닐을 쓰는 대형마트 배달은 단호히 끊었지만 고백하자면 배달음식의 달콤한 유혹에는 몇 번 넘어갔다. 그리고 음식을 배달시킬 때마다 따라오는 엄청난 수의 용기들은 늘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다.

되돌아보면 비닐 안 쓰기는 관찰-각성-시행착오-참회-개선의 무한루프를 반복한 것 같지만 이번 실천을 통해 얻은 것도 많다. 우선 장바구니 하나만 달랑 들고 다녔던 예전과 달리 새 친구들이 생겼다. 이제 장바구니와 함께 접을 수 있는 식품 용기, 비닐 대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면 파우치 3종 세트가 늘 기자와 함께한다.

그런가 하면 재래시장에서 ‘용기(勇氣) 내서 용기(容器)를 냈던’ 경험을 시작으로 이제는 어딜 가든 용기를 내미는 일이 예전만큼 어렵지 않게 됐다. 과일, 야채, 고기를 구입할 때는 물론이고 음식점에서 잔반을 담아오는 것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비닐 안 쓰기’를 마무리하면서 ‘플라스틱부터 음식물까지 한국형 분리배출 안내서’라는 부제가 달린 책 「그건 쓰레기가 아니라고요」를 읽었다.

책을 읽다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일회용 비닐봉지는 환경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무를 베어 만들어 한번 쓰고 버리는 종이봉투의 대체품이 비닐봉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비닐봉지, 비닐봉투지만 영어로는 ‘Plastic Bag’이라는 것만 봐도 사용 목적에 체감상 차이가 있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가방’을 ‘봉지’보다는 오래 쓰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비닐봉지를 여러 번 쓰는 물건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기자부터도 반성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 22장에서 쓰레기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재생 불가능한 자원 사용의 최소화, 소비 절제, 효율 극대화, 재사용, 재활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쓰레기 문제의 중심에 ‘비닐’이 존재하는 한, 기자의 ‘비닐 안 쓰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김현정 기자 sophiahj@catimes.kr>

이소영 기자가 다가올 기쁜 부활을 그리며 하늘로 헬멧을 던지고 있다. 기자는 사진을 찍을 때만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발길 닿는 대로 찾은 성당… 하느님 품은 언제나 포근하다”

결국 발길이 닿는 곳은 성당이었다. 이번 주, 자전거를 타기보다 더 많이 걸었다. 완연해진 봄 날씨에 천천히 봄기운을 느끼려 2시간을 걸어 퇴근하기도 하고, 제시간에 도착하려 지하철을 타는 대신 오후에 1시간을 걷기도 했다. 그때마다 귀가 전 도착지는 늘 성당이었다.

성당 정문 예수 성심상 앞에서 성호경을 외우며 기도하고, 성당 밖 담장 너머 보이는 마당의 아기 예수상과 성모상을 보며 묵상하다 보면 어느새 예정했던 1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출근하지 않아 자전거 타기 대신 1시간을 걷는 날에는 아예 성당 앞 공원 의자에 앉아 가만히 성당을 바라보거나 성당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등 3시간가량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발길이 닿는 곳은 결국 하느님 품이었다.

하느님 품에 안겨 있으면 늘 포근했다. 걱정이 되거나 짜증이 났던 일들은 머리나 마음속에서 말끔히 사라졌고, 미움이나 괴로움으로 가득 찼던 순간들도 ‘하느님 뜻이 다 있으시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다. 당장을 좌우할 만큼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에도 하느님과 예수님 사랑을 떠올리며 ‘이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 헤아리며 한 순간, 한 번이라도 더 그분을 닮은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매일 출퇴근길 자전거를 타며 지정된 장소에 자전거를 놓고, 장비를 챙기고, 부리나케 귀가하기 바빴던 지난 20여 일 사순 시기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한 주였다.

돌이켜 보면 이번 한 주 자전거 타기보다 걷기, 번화가보다 성당으로 이끄신 그 결정에는 하느님 품에 안기기까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준비하고 오라는 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도전을 하면서 당신이 창조한 만물을 느끼고, 예수님 사랑을 기억하며, 날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과 귀중한 나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날 가꿔 주시고 다독여 주신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20여 일간 대로변 상점 근처로만 걷던 내가 이번 주에는 이끌리듯 매일 성당을 찾았겠는가 말이다. 죽음으로써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느 정도 맞이할 준비가 돼 가고 있다는 의미 아닐까.

이번 한 주 자전거를 타고 걸으며 가장 눈에 띈 변화는 피어난 노란 꽃봉오리들이었다. 경칩이 지나 만물이 깨어나면서 나무들도 가지마다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사순 시기가 지나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나도 자전거 헬멧을 벗어 던지고 ‘부활’을 만끽하겠지만, 그동안 폭 안긴 하느님 품 안에서의 1시간 걷기만큼은 계속될 듯싶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이라는 말씀과 함께. “야호! 이제 곧 부활이다!”

<이소영 기자 lsy@catimes.kr>

교황의 서한을 읽고 힘이 된 부분을 밑줄 쳐 스마트폰에 가지고 다녔던 사진.

■ 책 읽고 묵상하기

“하느님과의 관계 돈독해질수록 내면의 힘 생기는 것 느껴”

70점! 이번 도전을 마무리하며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점수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더 낮아질 수도 있겠지만, 잘하라는 격려의 점수를 더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책을 펴는 것보다 결말이 궁금한 드라마를 보는 게 더 행복하잖아요!’라고 공감을 구해 본다.

사실 참회나 자선 행위는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과 하느님만 알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는 안다. 가수 이효리가 한 프로그램에서 나눈 일화가 생각난다. 남편 이상순이 의자 밑바닥에 사포질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여기 안 보이잖아. 누가 알겠어?”라고 말하자, 이상순이 “누가 알긴, 내가 알잖아”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다. 자기만 알지만, 그 관계가 돈독해질수록 자기 안에 어떤 힘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방법은 다양한데, 내게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장들이 그렇다. 업무 특성상 교황의 권고나 회칙, 서한 등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이 안의 문장을 읽으면 마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특히 힘들 때 그 문장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곤 한다. 남이 어떻게 되든 자기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무관심한 동료의 모습이나 상사의 무자비한 횡포, 심지어 교회 공동체 내에서조차 뒷담화나 나태에서 나오는 날 선 대화 등을 마주할 때 말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 영혼을 미소로부터 끌어내리려 한다. 마치 불행하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넘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를 고민하게 된다. 잘 살아가는 것이 마치 쓸모없는 일이 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럴 때 교황님 글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재작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60주년을 맞아 사제들에게 보낸 서한을 다시 꺼내 봤다. 당시 여러 이유로 힘들었던내게 힘이 됐던 부분을 밑줄 쳐 두고 사진을 찍어 스마트폰에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알게 모르게 참 든든했다.

교황은 이런 경험을 ‘달콤한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이런 슬픔이 우리 삶이나 공동체를 엄습할 기미가 있을 때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대신 확고한 마음가짐으로 성령께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자고 했다. 다시금 성령의 힘을 묵상해 본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달콤한 슬픔’은 계속되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야 비겁하지 않은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사람들 마음에 온기를 주고 그들과 칠흑 같은 밤을 지내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테니까!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