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장지동성당 연가(牆枝洞聖堂 戀歌) 5 - 가족(家族)과 식구(食口)의 사이에서 / 정연혁 신부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1-03-16 수정일 2021-03-16 발행일 2021-03-21 제 323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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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가운데 가족(家族)과 식구(食口)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한 집안의 친족, 곧 어버이·자식이나 부부같은 혈연관계로 맺어져 한 집안을 이루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식구’는 한 집안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전쟁때 월남하신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제게는 둘 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그리운 단어입니다.

‘먹는데서 정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혹은 제가 잠재적으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목했던 본당마다 음식과 관련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부활 판공은 무조건 구역으로 나가 동네잔치를 하게 만들었고, 반드시 만두는 빚어야 하며, 김장 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야 하고, 윷놀이 대회에서는 막걸리 나눔을 해야 하고, 가을 본당의 날 체육대회 때는 구역별로 음식 나눔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난해 김장 행사 경험입니다. 코로나19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틀간 김장을 했습니다. 첫날 새벽에 가까운 밭에 가서 배추를 캐오는 것을 시작으로, 신자들은 방역지침을 지키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봉사하도록 했습니다. 직장이 없는 할머니들이 주로 봉사하셨지만 일부러 직장에서 휴가를 내고 온 분도 계셨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배추 씻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었는데 자모회 어머니들께서 새벽부터 오셔서 힘들게 봉사하시고는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저는 그런 뒷모습을 보며 아침부터 소주를 기울였습니다. 왜냐하면 김장이 너무나 잘 되었고 아주 많이 해서 흡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신자 한 분께서 트럭째로 실어서 무를 많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 본당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음식을 많이 했습니다. 본당 분가 후 제 아파트 사제관에서 만두를 빚던 일부터 시작해 무말랭이, 고추장 된장 담기, 동충하초주와 차 팔기, 김밥에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밑반찬을 수없이 만들어 같이 먹었고 판매도 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우리는 식구가 됐고, 또 그러다보니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이 됐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형제자매가 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먹는데서 정만 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아주 놀라운,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에 속한 그 무엇말입니다.

음식이 되어 오신 예수님, 성체 안에서 지금도 먹거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소소한 일상인 먹는 일에서도 느껴집니다. 생명을 위해 먹을거리를 만드는 경험을 하며 우리 본당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신자분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가족이며, 예수님 몸을 먹는 식구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자매임을 조금씩 느낍니다. 우리 본당 모든 신자분들이 그렇게 느끼면 좋겠습니다. 그러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