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59) 부부와 함께하는 사제

고유경(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
입력일 2021-03-02 수정일 2021-03-03 발행일 2021-03-07 제 323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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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모습 달라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것은 같아
사제가 함께함으로써 혼인이 단지 두 사람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라는 것,
혼인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으로 부부를 이끌어 준다

지난 1월 30일에 세계의 ME 가족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ME 운동을 창시한 스페인의 가브리엘 칼보 신부님이 코로나19로 선종하셨다는 소식이었다. 가브리엘 칼보 신부님은 1950년대 말에 ‘문제’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문제의 근원이 가정이고 대부분의 가정 문제가 불안정한 부부 관계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부부관계를 강화하도록 도울 수 있다면 문제 청소년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부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60여 년 전 한 신부님이 뿌린 씨앗이 세계 곳곳에 퍼져 수많은 부부와 그 자녀들을 도왔다. 우리 부부도 그분이 시작한 선한 일의 도움을 받고 그 가치관에 동참하고 있으니 먼 나라 스페인의 95세 할아버지 신부님이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위인전에 나오는 위인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칼보 신부님이 시작한 첫 ME 주말은 196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는데 28쌍의 가난한 노동자 부부들이 참가하였고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66년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열린 그리스도인 가정 운동 세계회의에서 이 모임을 소개한 이후 ME 주말은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의 스페인어권 부부들에게 급속히 퍼져 나갔다. 미국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은 1967년에 미국에서 열린 첫 주말에 참여했던 척 갤러거 신부님을 통해서였다. 신부님은 주말에서 부부들이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사제 생활에 대한 새로운 열의가 솟아남을 체험했다. 그의 주도로 매리지 엔카운터는 60년대 후반부터 미국교회 내에서 활기찬 운동이 되었고 세계 곳곳에 퍼졌다.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부부 운동인 ME는 이렇듯 사제에 의해 창시되고 확산되었다. ME 주말은 세 부부와 한 분의 사제가 팀을 이루어 진행한다. 부부 프로그램에 사제가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제는 ME 주말에 봉사하기 위해 본당을 잠시 다른 사제에게 맡기고 몇 쌍의 부부만을 위해 주말을 온전히 내어놓는다. 우리 부부가 첫 주말에 참여했을 때 신부님이 우리 참가 부부들만을 위해 2박3일을 함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무척 놀랐고 감동했었다. 본당에서는 몇 백 명, 몇 천 명 중의 한 명에 불과한 신자로서 사제와는 개인적으로 대화조차 나눠보지 않았었는데 주말에서는 사제와 2박3일을 함께 지내며 사제 생활의 기쁨과 고통을 진솔하게 나눠 주는 모습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그러면서도 독신 생활을 하는 사제가 부부 생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주말을 지내며 그 의문이 조금씩 풀렸다.

혼인성사와 성품성사는 함께 교회의 생명에 필수적이며 두 성사 모두 관계를 매우 중시하는 성사이다. 혼인성사는 배우자에게 소속하고 헌신하기로 약속하는 성사이고 성품성사는 하느님께 소속하고 헌신하기로 하는 성사인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인 동시에 공통점이다. ME 주말에서 사제가 나눠주는 사제생활 안에서의 기쁨과 고통에 대한 체험은 부부가 배우자에게서 느끼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제는 하느님과 신자들을 배우자로 섬기며 사랑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사제의 발표를 들으며 부부들은 부부 관계를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깊이 깨닫는다. 사제가 함께함으로써 혼인이 두 사람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라는 것, 혼인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으로 부부를 이끌어 준다.

사제도 ME를 체험하고 봉사하며 부부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목 현장에서 신자들의 삶을 이해하고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ME 주말은 사제와 부부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아름다운 여정이다. 60년 전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칼보 신부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주님의 뜻을 이어받아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사제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고유경(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