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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4) 최양업 유학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2-23 수정일 2021-02-23 발행일 2021-02-28 제 323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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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거룩한 사제’ 기대주로 인정받아
낯선 환경에도 건강 유지하고 스승과의 토론에도 적극적
김대건보다 사제품 늦었지만 실망 않고 어학·신학공부 매진
조선 순교자 행적 라틴어 번역 82명 가경자 선포에 기여해
유학시절 배운 음악지식으로 훗날 천주가사 지은 것 추정

필리핀 롤롬보이 도미니코수도원 터에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김대건·최양업 신부는 유학생활 당시 필리핀의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3년 하고도 2개월. 최양업(토마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한 시간이다. 김대건과 함께 유학길에 오른 최양업 역시 김대건과 함께 낯선 곳을 전전하며 어렵고도 어려운 유학생활을 보냈다. 심지어 김대건보다 5년 늦게 사제품을 받았기에 유학생활도 더 길었다.

■ 촉망받는 신학생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브뤼니에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842년 4월 리브와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최양업이 얼마나 촉망받는 신학생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유학 시절 최양업은 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랜 여정과 낯선 환경 속에서도 건강했던 점은 학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양업은 비교적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학업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브와 신부는 1839년 6월 마닐라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최양업과 토론을 한 일화를 소개했다.

리브와 신부는 “토마스(최양업)는 천주 성삼의 제2위인 성자가 제1위인 성부보다 덜 능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며 최양업이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펼쳤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소죄의 통회와 죄사함, 독성죄에 관한 주장으로 스승과 갑론을박을 하기도 했다. 리브와 신부는 “그들이 독성죄에 관해 나를 믿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다”면서도 이런 교육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수동적으로 교육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탐구하며 지식을 익혀 나갔던 것이다.

최양업은 늘 주위의 기대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최양업보다 먼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건이었다. 김대건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해 페레올 주교에게 큰 감명을 줬기 때문이다.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지만, 5년이 지나서야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최양업은 늘 우등생이었음에도 먼저 서품받지 못하고, 5년 동안을 서품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시기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최양업의 편지에서도, 그와 함께한 스승들의 편지에서도 최양업이 낙심했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에 입국해 신자들을 도울 일념으로 공부와 기도,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김대건이 용기와 도전으로 자신의 단점을 뛰어넘었다면, 최양업은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실망하지 않고 성장해 나갔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최양업을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어려운 여행에는 덜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의 열심, 그의 뛰어난 재능, 그리고 꾸준하고 규칙적인 그의 행동은 그때부터 그가 나중에 얼마나 거룩한 사제가 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성실함으로 맺은 열매

최양업은 자신의 차분한 성품과 성실함을 십분 활용해 철학과 신학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쌓았다. 김대건 역시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을 구사할 수 있었지만, 최양업이 김대건보다 어학능력이 탁월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양업은 김대건보다도 더 긴 시간 어학공부를 했다. 일단 신학생으로 가장 먼저 선발된 만큼, 김대건보다 5개월가량 앞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김대건이 사제가 된 이후에도 5년 동안 프랑스 선교사인 스승과 함께 다니며 공부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인 신학생들이 신학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초기 방침을 변경해 프랑스어 교육을 중단하도록 했는데, 김대건이 1842년 12월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김대건은 “사전이 있었다면 프랑스어 책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반면, “토마스(최양업)는 프랑스어 책들을 읽을 허락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승들이 최양업에게 프랑스어 책을 읽는 일이 신학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양업의 어학 능력은 조선 순교자들이 복자가 되는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빛을 발했다. 최양업은 아직 사제품을 받기 전인 1847년 홍콩에 머물 당시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라틴어로 번역된 이 문서는 교황청으로 보내졌고, 이 자료에 기록된 82명은 1857년 모두 가경자로 선포됐다.

또한 중국어 능력도 뛰어나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던 당시에는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을 중국어, 즉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어학 능력만이 아니라, 최양업의 교리와 신학 지식도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을 쓴 차기진(루카)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은 “최양업 신부는 부친 최경환이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성장기에 한문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다”며 “그러나 중국에서 13년 동안 생활하면서 중국인 신자들의 강론과 교리교육을 맡을 정도로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하게 됐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또한 “베르뇌 주교가 가장 중요한 기도서와 교리서인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 번역에 최양업 신부를 참여시킨 이유도 그의 학문과 교리 지식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최양업은 유학기간 중 음악도 상당 수준 익힌 것으로 보인다. 1837년 최양업과 김대건의 스승인 칼르리 신부는 편지를 통해 조선인 신학생들의 노래 실력이 좋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음표를 좀 가르치고, 교회의 성가와 조선 곡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곡의 성가들까지도 노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에 걸쳐 ‘손풍금’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음악 지식을 습득했을 최양업은 1858년 조선에서 사목하던 중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양 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 즉 여러 개의 건반이 딸려있는 풍금을 요청했다. 최양업은 이미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음악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를 사목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최양업이 사목에 교회음악 지식을 얼마나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최양업은 ‘선종가’, ‘사심판가’, ‘사향가’ 등 신자들이 노래하며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천주가사’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학시절 배운 음악과 신학 지식을 우리 문화에 녹여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천주성교공과」

울산대곡박물관의 사향가(‘천주교의 큰 빛 언양’ 도록 일부).

■ 김대건·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필리핀 롤롬보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지

김대건과 최양업은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중 일어난 소요를 피하기 위해 필리핀에서 유학생활을 이어나갔는데, 그 장소가 롤롬보이에 자리한 도미니코수도원이었다. 신학생들은 3차례에 걸쳐 이곳을 방문했는데, 그 머문 기간을 모두 합치면 1년가량 된다. 현재 성 안드레아 수녀회가 이곳에 성지를 조성해 관리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