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69) 이게 아닌데…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1-19 수정일 2021-01-19 발행일 2021-01-24 제 3229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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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두 부부로부터 내가 살고 있는 공소로 1박2일 방문을 오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겨울의 시골은 분위기가 썰렁하고 빈 바람만 휘–이–잉 불기에…! 이왕 오실 거면 동백꽃이 찬란한 봄이나 시원한 바람이 상큼한 여름, 혹은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오시면 좋으련만, 굳이 황량하고 휑한 벌판만 보이는 12월에 오신다니!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공소 방문을 오시면 나의 소박한 시골 생활에 약간은 동정어린 눈길을 주실 테고, 앞으로 뭔가 필요한 일들이 생기면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실 수도 있겠지.’

이윽고 주일 날 12시 즈음 낯선 차량 한 대가 공소에 도착했고 그분들이 오셨습니다. 마치 가족을 만난 듯 반가움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내 곧,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분들은,

“신부님, 시내에서도 떨어진, 너무 외곽에 사시는 거 아니에요?”

“수도원에서는 나무 보일러를 쓰시네요. 나무가 다 타면 새벽엔 안 추우세요?”

“신부님 여기 근처에 아무 것도 없네요. 외출은 어떻게 하세요?”

예상대로 동정의 질문들이 쏟아졌고, 나는 마치 꽤 오랜 동안 시골 생활을 해서 익숙한 듯, 이제는 모든 것에 초연한 사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를 더욱 더 안타깝게 불쌍하게 바라보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면서, ‘나의 계획대로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신부님, 점심 먹으러 가요. 점심 뭐 드실래요? 오늘은 신부님이 드시고 싶은 것을 드셔요.”

우리는 공소에서 가까운 간장게장 집을 찾았습니다. 가서 보니 내 수준에는 음식 값이 비싼 듯 했지만, 맛있게 그리고 기쁘게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 일행은 차량을 이용해 동네에 있는 해안 길을 따라 천천히 드라이브 했고, 나는 차 안에서 그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안 길을 달리던 차는 다시 도로로 빠져나와 새롭게 이어진 도로를 달렸습니다. 농사가 거의 다 끝난 12월의 시골 길이었지만, 벌판 주변으로 펼쳐지는 자연들은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서서히 일몰이 펼쳐졌고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 다다랐습니다. 저멀리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나르고, 바닷새들의 무리는 총총거리며 어디론가 날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밤이 오고, 별들이 뜨고, 은하수 너머 유성이 떨어지면서 별똥이 밤하늘에 꼬리를 그려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좀 늦게 저녁을 먹고 그분들 숙소를 확인한 후 나는 다시 공소로 돌아오려는데, 그분들이 먼저 내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신부님 사시는 곳이 궁금해서 왔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 신부님을 생각하니 저희들의 걱정이 부끄럽네요.”

“맞아요, 신부님.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 공기도 너무 좋고 오히려 저희들 사는 곳이 힘들게만 느껴지네요.”

‘헐…, 이게 아닌데.’ 내 계획과는 달리 그 부부들은 공소 주변의 환경을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는 항상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별이 뜨고, 달이 주변을 비추고, 바람이 불고 그리고 별똥이 떨어지는 장면이 수없이 펼쳐졌습니다. 순간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자연의 조화로움이 펼쳐졌는데, 단지 나만 모르고 살았습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자연보다 귀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삭막한 시골 풍경을 보여주려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자연에 도취된 행복한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