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1-01-12 수정일 2021-01-12 발행일 2021-01-17 제 322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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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위해 헌신

오블라띠회 설립자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19세기는 교회 안에서 많은 선교수도회가 창설되던 시기다. 이즈음 1816년 프랑스에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이하 수도회)가 새로운 삶을 출현시켰다.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지만, 특별히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는 말씀을 깊이 받아들여 가장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복음 전파를 카리스마로 삼았다.

수도회를 창설한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는 “너희들 안에서 사랑, 사랑,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서 열정을 다해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회원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며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어진 선교 사명을 완수한다. 그처럼 오블라띠인의 삶은 인간 공동체를 위한 삶이다.

178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성인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계속 유랑하며 친구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생활 속에서 성인은 예수회 영성을 소개받았다. 예수회 사제로부터 기도하는 법과 고행을 실천하는 법을 배웠고, 그를 통해 성모 신심을 갖게 됐다. 이를 두고 성인은 훗날 “거기에서 내 사제직 성소가 싹텄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불씨는 오래가지 못했다. 편안하고 세속적인 삶을 추구했다.

20세 때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윤리적 혼란 속에 교회는 파괴됐고 짓밟힌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종교적 무지도 만연했다. 성인은 성금요일에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며 지난 삶을 회개했다. 그리고 시대 안에서 교회의 시급한 요구에 동참하기로 했다.

1808년 파리에 있는 생 쉴피스 신학교에 들어간 성인은 1811년 사제품을 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제요 종’이 될 꿈을 세웠다. 황폐해진 젊은이들과 전쟁 포로들을 직접 만나면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뜻은 더욱 커졌다.

교구의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엑상프로방스 지역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 젊은이들, 병자들에게 다가가면서 자신의 직무를 시작한 성인은 이런 사목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절실하게 체험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열성적으로 일할 사제들의 공동체를 떠올렸다. 그 목적은 ‘전부이지만 많은 이들 마음에서 사라진 신앙’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선교회 설립을 위한 온갖 노력 속에 마침내 1816년 1월 25일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프로방스의 선교사들’이란 이름으로 선교회가 탄생했다. 성인과 동료들은 상호 순명의 서약을 하고, 혁명으로 피폐해진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1826년 2월 17일 레오 12세 교황은 선교회를 공식 승인했다. 이때 수도회 명칭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오블라띠 선교 수도회)로 변경됐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