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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아! 최양업

이소영 기자
입력일 2020-12-28 수정일 2020-12-29 발행일 2021-01-01 제 322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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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000리<약 2750km> 걸어 사목 활동… 한국 첫 증거자 복자 탄생하길
한국교회 최초로 신학생 선발
성 김대건 이어 두 번째 사제
갖은 고초에도 신자 만나려 휴식 없이 사목하다 과로사
1976년 청주교구 시작으로 40년 넘게 시복 위해 노력
신자들 기도와 관심 절실

올해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1821~1861)의 탄생 200주년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인 최 신부는 아직 시복되지 않았지만, 생애와 신앙인으로서의 궤적 등 그 삶은 신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2021년에는 최 신부가 복자품에 오르길 기도하며 그의 삶과 신앙, 시복 추진 과정을 살펴본다.

■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삶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1847년 9월 20일, 부제였던 최양업 신부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승 메스트르 신부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에 입국하려다 강풍을 만나 난파해 귀국에 실패했지만, 이 또한 하느님 뜻으로 여기며 계속해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 신부는 실제로 평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삶’을 살았다. 어릴 때부터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는 부모를 따라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 1836년, 15세 때 프랑스 출신 선교사 성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첫 한국인 신학생으로 선발됐으며, 생소한 외국어인 라틴어 수업을 받으며 목자로서의 삶을 준비했다.

그해 동료 신학생(최방제, 성 김대건)들과 순명·복종 서약을 한 최 신부는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 필리핀 마닐라, 다시 마카오로, 만주 소팔가자 등을 거치며 계속 수학했다. 그렇게 목자로 살기 위해 노력한 최 신부는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 조선 복음화 위해 땀으로 증거

수차례 시도했지만 난파와 조선에서의 박해 등으로 번번이 조선 입국에 실패한 최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그해 5월 중국 요동 지방에서 사목을 시작했지만, 최 신부에게는 조선의 복음화라는 바람이 있었다. 다시 귀국을 시도한 끝에 그해 12월 3일 13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최 신부는 각 처에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땀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1850년 초부터 6개월간 5개 도, 5000여 리를 걸어 다니며 3815명을 순방했다. 이후에도 매년 7000리가 넘는 거리를 다니며 사목 활동을 펼쳤다. 전국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서양인으로 오해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포졸과 외교인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맸고, 박해를 피해 경상남도 외딴 지역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최 신부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을 향한 애정을 빼앗을 순 없었다.

최 신부는 매일 80리에서 100리가 되는 거리를 걸으며 밤에는 신자들이 고해할 수 있게 했고, 날이 새기 전에는 또다시 떠나곤 했다. 그렇게 나흘 동안 계속해서 하느님 일을 하고 나서야 휴식을 취할 정도였던 최 신부는 결국 1861년 6월 15일 과로에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12년 가까이 길 위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최 신부는 떠나는 순간에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뇌었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현재 최 신부는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 안장돼 있다.

2018년 9월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에서 최양업 신부 성상 및 무명순교자 십자가상 축복식이 열린 뒤 성지 전담 김영직 신부(성상 왼쪽 세 번째)와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이뤄지려면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이 절실하다. 다락골성지 제공

■ 시복되면 공적 경배 공경 가능

최 신부 시복시성 운동은 40여 년 전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시작했다. 1976년 당시 진천본당 주임이었던 장 주교는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본당 관할 배티공소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처음 최 신부에 대해 들었다. 이후 자료 조사를 한 장 주교는 최 신부가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라는 점을 확인했고, 이를 당시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추기경에게 알렸다.

1996~1997년 청주교구 배티성지는 최 신부 전기 자료집을 간행했고, 장 주교는 1997년 7월 시복 요청 청원서를 정 추기경에게 제출했다. 정 추기경은 그해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이를 안건으로 제출했고 이때부터 최 신부 시복을 위한 한국교회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 신부 시복 법정은 2005년 12월 3일 개정돼 2009년 5월 20일까지 총 13회 열렸다. 그해 6월 3일 주교회의는 최 신부 시복 법정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고, 시성성은 시성성 통상 회의에서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 자료 ‘심문요항’을 2016년 3월 14일 통과시켰다. 같은 해 4월 26일 최 신부는 교황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됐다. 가경자는 순교나 영웅적 덕행이 인정돼 ‘공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순교 사실 자체로 기적 심사가 면제되는 순교자와 달리, 최 신부와 같은 증거자는 ‘영웅적 성덕’과 ‘기적’ 두 가지 모두 인정받아야 복자가 된다. 때문에 주교회의는 시복을 위한 다음 단계인 기적 심사 통과를 위해 2015년 9월 8일부터 총 14회에 걸쳐 기적 심사 법정을 마련하고, 2016년 6월 17일 시성성에 기적 심사 법정 문서를 제출했다. 시성성은 이를 전문가 등의 철저한 조사를 거쳐 기적으로 확인하면 통과시키고, 교황이 최종 재가하면 최 신부는 복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는 최 신부를 공적 경배로 공경할 수 있고, 한국교회 최초 증거자 복자 탄생이라는 경사도 맞는다.

■ 시복 위해 신자들의 기도 절실

한국교회에서는 최 신부 시복을 위한 기도를 신자들에게 청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21년 사목교서를 발표하면서 “40여 년 동안 시복을 추진해 온 최 신부님 삶과 신앙을 묵상하며 그분을 본받는 한 해를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탄생 2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최 신부님이 시복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신자 여러분의 열렬한 기도를 청한다”고 밝혔다. 교구 신자들에게는 ‘최 신부 발자취 찾아가기’, ‘최 신부 시복시성 기도 전개’ 등을 주요 실천 지침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도 지난해 11월 29일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공식 개막 미사에서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최양업 신부를 언급하며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그분들의 사제적 열정과 사목적 헌신을 깊이 묵상하며 신앙 쇄신을 이루는 의미 있는 희년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2007년 4월 15일 당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주교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기적 심사에 즈음하여’를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하며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며 “열심한 마음으로 최 신부님 유적지를 순례하거나 기도를 많이 바쳐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소영 기자 ls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