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새로 선포된 교구 순례사적지] (4) 제2대리구 용문성당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12-15 수정일 2020-12-15 발행일 2020-12-20 제 322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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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곡절 견디며 이어온 유구한 신앙 유산
초기 신앙선조들 활동하며
양평지역 복음화 모태된 곳

용문성당 전경.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선조들이 머물던 양평지역에서 본당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복음화를 일궈왔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구는 11월 29일 제1대리구 왕림·안성성당, 제2대리구 하우현·용문성당을 교구 순례사적지로 선포했다. 교구 순례사적지 특집 마지막으로 제2대리구 용문성당(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 421)에 이어오는 신앙 역사를 찾아본다.

■ 한국교회가 뿌리 내린 지역

용문성당이 자리한 양평지역은 초기 신앙선조인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살던 곳이다. 특히 성당 인근 용문산은 하느님의 종 권일신과 조동섬(유스티노)이 함께 8일간 피정을 했던 장소기도 하다. 이 지역의 학자들은 양평·광주·여주가 맞닿은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열어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고, 학문 영역을 넘어 교리를 실천하고 믿음을 키워나가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초기부터 신자들이 머물던 지역인 만큼 양평지역 박해는 거셌고,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 성당에서 불과 10여㎞ 떨어진 양근에서는 복자 조숙(베드로)과 권천례(데레사) 동정부부, 윤유오(야고보), 윤점혜(아가타),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가 참수에 처해졌다. 또 병인박해 순교자인 민효원, 조 서방, 조 타대오, 조치언 등이 현 용문본당 관할지역 내에 살았다. 순교자 민효원의 무덤은 현재 본당 관할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로도 숨어든 신자들이 옹기를 만들며 생활하는 등 교우촌을 이뤘지만, 연이은 박해로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신자 수가 줄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1886년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교우촌에 하나 둘 공소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신자 수가 점차 증가했다. 이에 1908년 3월 5일 조제(Jaugey, 楊秀春,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용문면 덕촌리 퇴촌에 부임하면서 용문본당이 설립됐다.

1915년 퇴촌에서 용문면 마룡리로 자리를 옮긴 옛 용문성당 전경. 용문본당 제공

■ 우여곡절 속에서도 신앙 전파

본당 설립 당시 조제 신부는 신자들이 구입한 민가를 성당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퇴촌은 지리적으로 사람들의 생활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공간도 협소해 전교에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1915년 용문면 마룡리(마내)로 성당을 옮겨 전교에 박차를 가했다.

본당은 경기도 포천·여주 일대와 강원도 화천·양구·춘천 등의 34개 공소와 1567명의 신자들을 사목했다. 본당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300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1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1939년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가 용문에 방문했을 때는 120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견진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용문성당은 본당과 공소를 오가고 성당을 소실하는 등 여러 곡절을 겪어야 했다. 1943년 양평본당이 설립되면서 용문본당은 양평본당의 공소가 됐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성당이 반파돼 1956년 성당을 새로 지었다. 1958년 김영근 신부가 부임해 다시 본당으로 부활하고 활발한 선교로 청운면 여물리에 공소를 만드는 등 활기를 띄기도 했지만, 김 신부 은퇴 이후 사제 파견이 이뤄지지 않아 다시 공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은 잃지 않았다. 1967년 용문이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선교를 위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됐다. 1970년에는 본당 첫 레지오마리애 쁘레시디움인 ‘매괴의 모후’가 설립됐고, ‘공소 신심회’도 조직했다. 당시 본당은 공소 신심회를 통해 공소 신자들의 신앙심을 북돋을 뿐만 아니라 본당 내 공소 사이의 격차를 없애고 공소 신자 전체가 본당 운영에 참여하도록 도왔다. 이후 1992년에는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고, 1997년에는 양동본당을 분가시키기도 했다.

성당은 조선시대의 박해뿐 아니라 한국전쟁 때의 박해도 기억할 수 있는 곳이다. 본당 제3대 주임 신부인 하느님의 종 필립 페랭 신부(Philippe Perrin, 白文弼)가 1950년 9월 대전 프란치스코수도원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필립 신부는 현재 근현대 신앙의 증인 중 한 명으로 시복절차를 밟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