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한국교회사연구소, 204회 연구발표회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12-15 수정일 2020-12-15 발행일 2020-12-20 제 322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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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의 삶과 사상 배경은 가톨리시즘”
천주교 교리 바탕에 둔 활동과 가치관 재조명
동양사상 중심 연구됐지만 신자로서 주목 못 받아
“지학순 주교와의 교류는  공동합의성 실현의 모델”

사회운동가이자 생명운동가로 활동한 장일순(요한·1928.9.3.~1994.5.22. 사진)의 사상적 배경이 가톨리시즘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끌었다. 이 같은 주장은 12월 12일 오후 3시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가 온라인으로 진행한 제204회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됐다. 발제는 백효민 박사(상지대 강사)가 맡았다.

장일순은 1953년 원주 대성학원 설립에 참여해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1958년부터 총선에 출마, 정치활동을 펼치고 군부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농민·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 생명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해온 운동가다. 장일순이 유학·노장사상을 비롯해 동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장일순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동양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지만 그동안 천주교 신자로서의 장일순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다.

발제를 맡은 백효민 박사는 ‘장일순 안의 가톨리시즘, 1950~1980’을 주제로 장일순의 삶과 사상에 가톨리시즘이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고찰했다.

백 박사는 “많은 연구들이 동학이나 동양사상과 연관 지어 장일순을 연구하고 있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장일순의 말년을 보고 이뤄진 연구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면서 “장일순 생각의 변화과정을 가톨릭시즘으로 살펴 그가 천주교 교리를 바탕으로 어떤 활동을 전개했으며 생각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살폈다”고 말했다.

백 박사는 장일순이 원주 원동본당의 첫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치명자의 모후’ 초대 단장을 역임하고, 원주교구에서 조직된 첫 꾸르실료의 지도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고(故) 지학순 주교를 만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가톨릭 사회교리를 배우고 익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이후 원주교구 내에 청년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에게 조언하면서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준비해 1970년대 가톨릭 사회운동이 전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도 조명했다.

백 박사는 “장일순에게 지학순 주교와 교회는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공의회의 가르침에 기반해 교회의 우산 아래 모여 든 이들과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가톨리시즘을 실현하려 했다”면서 “장일순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살아 낸 ‘가톨릭 신자 장일순 요한’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논평을 맡은 현재우(에드문도·서강대 강사) 박사는 “백 박사의 연구가 기존 연구와 달리 가톨리시즘의 관점에서 장일순을 재조명해 기존 연구의 공백이었던 부분을 볼 수 있게 해 줬다”며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에게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공동합의성을 실현하려는 노력들을 볼 수 있어 이 모델이 오늘날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