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생각하며 / 옥수복

옥수복(마리아) 시인
입력일 2020-12-08 수정일 2020-12-08 발행일 2020-12-13 제 322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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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가난한 조각가가 대리석 가게 앞을 지나다가 대리석이 거대한 원석으로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가격을 물었을 때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 돌덩어리라면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그것을 팔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가게는 비좁은데 그 돌덩이가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어서 아주 골칫거리입니다.”

그 조각가는 주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후 그 대리석을 자신의 작업장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작품을 구상한 후 정과 망치로 작업을 시작했고, 2년이 지나 그 조각가는 작품을 완성시켰다.

그 조각상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였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시인이었지만 그는 조각가라는 말을 가장 좋아했고, “나에게 있어 조각이란 돌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을 꺼내는 작업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불길 속의 내 혼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깊은 신앙심의 예술가는, 돌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계신 성모님을 보았고, 그 영감을 돌덩이에 새겨 넣었다.

그래서 한낱 돌덩이는 위대한 예술가의 손을 통해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던 소중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은 후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몸을 의탁한 아들로서의 마지막 안김, 그 아들 예수를 무릎에 누이고 담담하게 슬픔을 삼키는 고요하고 경건한 어머니. 그 피에타 성모님을 만들었을 때 25살이었던 미켈란젤로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데다 워낙 걸작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날 어떤 롬바르디아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자, 화가 난 그는 피에타상이 있는 성당으로 몰래 들어가서 마리아의 어깨에서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에,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새겨 넣었다.

저녁이 되어 성당 밖으로 나온 미켈란젤로는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보았다. 그때 그는 저 아름다운 하늘의 모습을 만드신 분은 ‘어디의 누가 만든 하늘이다’라는 표시를 하지 않는데, 고작 내가 만든 작품 하나에 경솔한 행동을 하다니 하고 후회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떤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 그런 미켈란젤로는 살아 있는 동안에 훌륭한 전기가 2편이나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로서 생전에 유명해졌는데, 그의 예술 생애에 대한 기록이 당시나 그 이전의 어느 예술가보다도 훨씬 풍부하게 남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하느님의 작품인 대자연을 보면서 자신의 작품에 사인하지 않기로 작정한 그의 겸손한 마음을 하느님께서 보신 건 아닐까?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의 예술을 기록시키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시인은 이름에 대해 초연한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소백산 줄기의 산골짜기에 귀농하여 시인 농부로 살게 된 나는 미켈란젤로가 돌덩이 속에 숨어 있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았듯이 내가 키워 내는 작물들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한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빨간 고추에서 예수님의 피를 보았는데 온몸에 전율이 왔고 ‘고추씨의 기도’ 시를 썼다.

‘갈바리아 십자가의 피 같은 그 순수 빨강을/ 당신의 주님께서 세상 위해 흘린/ 선혈 같은 그 빨간 핏빛을/ 고추 아기들의 몸빛으로 주소서.’라고.

그 몸빛이 사람들의 피 속에 생생히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옥수복(마리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