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전하는 자리
공베르 신부는 안성 지역 가난한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모국에서 포도나무 묘목을 가져와 포도 농사를 가르쳤다.
공베르 신부는 미사주를 만들기 위해 심은 포도나무가 잘 자라는 것을 보고 안성지역이 포도농사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공베르 신부는 모국인 프랑스를 32차례나 오가며 포도 재배법을 배워오고, 포도나무 묘목을 가져와 안성 지역에 적합한 포도 농사 방식을 실험하고 재배에 성공했다. 이어 성당 주변 토지 50만 평을 매입해 지역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공베르 신부는 오늘날 ‘안성 포도’의 시초가 됐다.
안성본당은 안성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본당은 지역사회의 요청을 받고 안법학교를 설립해 지역민들을 교육했다. 교육을 통해 선교를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는데 교육이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안법학교는 현재 안법고등학교로 이어오고 있다.
공베르 신부는 1919년 3·1운동 때는 지역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독립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주민들을 성당에 들여 붙잡히지 않도록 돕기도 했다. 이후에도 가난한 소작농에게 전답을 나눠주기도 하고, 흉년에는 양식을 나눠주는 등 지역민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해왔다.
1922년 건축된 안성성당의 모습에서도 지역과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드러난다. 성당은 우리 전통의 목조건축방식과 서양의 바실리카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건설됐다. 성당은 성당 건축사와 근대건축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1985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국가사적지 승격을 위해 준비 중이다.
안성본당은 설립당시 안성, 평택 지역 뿐 아니라 충청도 천안, 진천까지도 관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지역과 함께하며 복음을 전한 안성본당의 노력으로 신자가 꾸준히 증가해 1928년 평택본당, 1938년 천안 오룡동본당, 1956년 진천본당, 1958년 미양본당, 1970년 대천동본당, 1983년 죽산본당, 1992년 던지실본당 등 많은 본당의 모본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