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것 / 신중신

신중신(다니엘) 시인
입력일 2020-11-17 수정일 2020-11-17 발행일 2020-11-22 제 322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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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나

“가톨릭 교인에게서 무슨 향기가 맡아질 거라는 것처럼, 이 「시문학」을 손에 하면 곧 안에서 시향이 풍겨 나오는 것만 같았다.”

-시인 노천명은 젊은 시절 ‘시문학파’를 외경하고 교류를 이어 왔으며, 그 후 가톨릭에 입교하게 된다. 위의 글은 수필 ‘시문학 시절’에 나오는 한 구절로, “가톨릭 교인에게서 무슨 향기가 맡아질 거라는 것처럼”은 모든 가톨릭 교인이 가슴속에 새겨 둘 만하겠다.

그 둘

천주교회 미사 예식 가운데 이 대목에서 나는 자주 마음에 파문이 일곤 한다.

미사는 크게 전반부의 말씀의 전례와 후반부의 성찬의 전례로 나누어진다. 그 성찬의 전례는 또한 ‘감사기도’, ‘영성체 예식’으로 대별된다. 여기서 ‘감사기도’는 사제가 세상을 섭리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소망을 간구하는 기도가 핵심을 이룬다. 그 소망, 다시 말해서 사제의 입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바를 주님께 청하는 부분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주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곧 부활에 동참하는 걸 가리키며, ‘나’의 부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 연옥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신자들, 나아가서 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당신 자비에 맡겨진 영혼도 기억해 주십사 하는 바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내가 언제 이처럼 평소에 몰랐던,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졌더란 말인가? 그 모르는 사람, 더구나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고 지낸(어쩌면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게도 자비가 미치기를 바랐더란 말인가?

매주 기도문으로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이 대목에 이르면 순간적이나마 가슴에 잔물결이 인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걸 새삼 일깨워 줌에서 얻는 따스함, 부지불식간에 인류 공동체의 한 개체로서 타자와 연대해 있다는 자긍심 같은 위로를 모름지기 받는 탓이겠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과장·허황되다는 핀잔을 받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달리 말할 수도 있다. 그냥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삽상해진다고…. 그냥 마음이 뭉클해진다고….

그 셋

인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숲에 바늘이 떨어지면, 독수리가 보고 사슴이 듣고 곰이 곧장 냄새를 맡는단다.

‘격언’이란 낱말의 사전 풀이로는 ‘사람이 오랜 역사적 생활 체험에서 이루어진, 인생에 대한 교훈과 경계 따위를 간결하게 표현한 짧은 글’이라 한다.

우리 언어생활에도 바늘을 일컬어 사물로서의 작은 것을 강조하며, 이런 의미에서 파생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같은 어구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이 아주 난망함을 상기시키는 비유이기도 하다. 그 작은 것이 숲으로 떨어진다면 아무도 몰라야 마땅한데, 그걸 누군가가 반드시 보게 마련이고, 그것도 소리라고 무엇이 귀를 쫑긋거렸으며, 더구나 날 리가 만무한 냄새를 어떤 개체가 맡아낸다니 세상사에 비밀이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의 한 알레고리이다.

위의 교훈적 격언을 새기고 살아간다면, 어떤 국면과 맞닥뜨릴지라도 크게 낭패를 보거나 험한 일을 당하진 않을 것 같다. 어떤 행위를 아무도 몰래 할 수는 없다는 것, 무언가를 하면 하늘이 보고 시간이 알고 양심이 먼저 느끼게 될진대 말이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사리(事理)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중신(다니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