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천주교 탄압’ 대원군 현판 밑에서 미사를 / 김지영

김지영(이냐시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빙교수
입력일 2020-11-17 수정일 2020-11-18 발행일 2020-11-22 제 322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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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가, 외가를 불문하고 그리스도교적 배경이 사실상 전무했던 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현실적인 소망 몇 가지를 갖게 됐다.

첫 번째는, 평생 ‘예수쟁이들’을 미워하신 어머니가 세례를 받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고향인 영주 무섬마을의 큰집 해우당(海愚堂) 현판 아래에서 미사를 올리는 일, 세 번째는 천주교 사회교리를 ‘언론’이라는 직업적 소명을 통해 드러내는 것으로 미미하지만 내 믿음을 봉헌하는 것이었다.

세 가지 소망은, 처음 마음에 품을 때만 해도 한결같이 이루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세 가지는 모두 이루어졌고 그 진행과정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머니가 세례를 받은 일이나, ‘해우당의 미사’ 역시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기적적으로 성사됐다.

경북 북부지방은 사고와 생활의 방식에서 여전히 유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무섬도 그 전형적인 마을이다. 무섬 주민들이나 그 후손 중에는 이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적잖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성천이 휘감고 돌아가는 물도리동, 무섬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내세우며 행동하질 않는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서양 종교’가 무섬에서 자체 행사를 열어본 적이 없다. 그런 터에 드러내놓고 예수를 추종하는 행사를 했다가 무슨 말이 나올지, 무슨 뒤탈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해우당 미사에 대한 꿈을 버리질 못했다. 지금은 고래등 같이 큰 기와집 건물만 덩그렇게 남은 해우당, 이곳에도 조선 말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파란과 굴곡은 간단없이 밀어닥쳤다. 일제 기간 중 해우당과 무섬마을은 영주지역에서 치열한 항일 투쟁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는 민족의 운명과 집안의 영고성쇠 속에서 생존 투쟁을 벌였던 조상들의 안식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싶었다. 더욱이 ‘해우당’ 현판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친필. 병인박해(1866) 등으로 천주교인들을 무참하게 탄압했던 대원군의 글씨 밑에서 천주교우들과 함께 지난 세월의 화해, 새 시대의 평화를 간구하길 원했다.

2010년 봄철이었다. 가톨릭언론인회에서 무섬마을 인근인 봉화의 우곡성지를 순례하겠다고 알려왔다. 당시 가톨릭언론인회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의 천주교 성지를 차례로 순례하던 중이었다.

나는 “때가 왔구나!” 싶었다. 회원들에게 우곡성지를 일찌감치 순례하고 해우당에 와서 미사를 올리자고 제안을 했다. 미사는 성지순례단을 지도하시는 성바오로 수도회 신부님들이 집전해주시기로 했다. 나는 이틀 전에 미리 해우당으로 내려와 미사를 올릴 수 있도록 집안 청소 등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드디어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탄 회원 70여명이 해우당에 도착했고 이들 모두 대청에 올라 미사를 올렸다. 회원들의 기도소리와 우렁찬 성가가 해우당 대청에 울려 퍼졌다. 해우당은 물론, 무섬마을이 생기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사가 끝나자 “주인이 한 말씀 하라”는 권유가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는데, 입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두 눈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회원들이 미사를 마치고 다과를 들며 이야기를 나눌 때, 안대문으로 웬 남녀 두 분이 들어섰다. 지난 10월 ‘신앙인의 눈’ 칼럼에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 집안에서 최초의 목사님으로 변신해 파란을 일으켰던 육촌 형님 김흡영 목사 내외분이었다. 우연히 큰집에 들렀다는데 우연치고는 필연과 같았다.

나는 형님 내외를 소개하고 형님에게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마당 한가운데에 선 김목사님은 “내가 천주교 신자 지영에게 선수를 뺏겼다”는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 형님 역시 해우당에서 목회를 하고자 간절하게 소망했지만, ‘후환’이 두려워 선뜻 실행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같은 시대를 사는 김 목사님과 내가 같은 고민, 같은 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오랫동안 소망해왔던 해우당 미사는 신부님이 아닌 목사님의 기도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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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이냐시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