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44) 야생화는 햇살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이성애 (소화데레사·꾸르실료 한국 협의회 부회장),
입력일 2020-11-10 수정일 2020-11-10 발행일 2020-11-15 제 321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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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빠진 그 어떤 다짐도 소용없음을… 
사랑이 없었던 기다림과 나만의 잣대와 내 마음이 좋을 때만 했던
이중적인 배려 등을 나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었기에
이 늦가을에 다 떨구어 내고 비움의 시간을 준비하려 한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늦가을 바람에 코끝은 시리지만 바람결이 너무 좋아 가슴이 벅차게 뛰어오른다. 이 바람결을 통해 유년 시절 맡았던 늦가을의 내음과 정경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잊혀 가는 삶의 조각난 기억들이, 불어오는 바람결을 통해 떠오르면서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주님의 품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음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눈물을 훔친다.

출퇴근 시간 늦가을의 나무들을 보면서 인생을 배운다. 울창하고 화려했던 나뭇잎들을 다 떨구어 내고 비움의 시간을 가지려 준비하는 나무를 보면서 나 또한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움켜잡고 있었던 것들을 나뭇잎처럼 떨구어 내려 한다.

14년 전 꾸르실료에 입소하여 ‘주님 제가 무엇이라고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 주셨습니까?’하고 통곡하면서 깨달은 후부터 주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으려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앞으로는 나의 잣대에 맞추어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주님께서 죄 많은 나를 사랑으로 기다려 주신 만큼 나 또한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표현하지 않고 기다려 주기로….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간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당장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내가 그토록 자신했던 지나온 시간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며칠을 속앓이를 한 후 나의 교만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었다.

‘꾸르실료 수료 후 나는 변화되었기에 내 방식대로 이끌어 가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참아 주고 기다려 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지낸다고 내심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이렇게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뭘까…’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니 나의 기다림에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랑’이 없었다. 오로지 나 자신과의 의무적인 약속 이행만 있었을 뿐.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를 보듬고 기다려 주셨지만 나의 기다림에는 상대방에 대해 경시하는 마음과 때로는 포기해 버리는 마음이 가득한 채, 언어로 표현만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닫고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나름 잘하고 있다고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니 통회의 눈물이 절로 흘렀다. 꾸르실리스따로서, 꾸르실료 봉사자로서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한지 나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며 주님께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동료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부재로 인해 겪었을 외롭고 힘든 순간마다 성모님의 사랑이 함께 하셨기를 청하며, 앞으로도 주님께서 지켜 주시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다. 상대방의 생각과 표현 방식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 없이 흘려보냈던 안타까운 시간에 대한 보속으로 그들에게 축복을 빌며 사랑을 담아 다가가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며칠 전 동료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주어졌다. 만약 나였더라면 유년 시절부터 한결같이 성실하게 선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며칠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격려와 응원과 미안함을 담아 준비를 하여 내 마음을 전했다.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사랑을 듬뿍 받는 이의 표정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내가 표현한 사랑보다 더 애틋한 사랑으로 수줍게 마음을 전해 주는 동료를 보면서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잔잔한 감동이 전해져 옴을 느낀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또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다.

늦가을의 나무처럼 나에게 불필요한 나뭇잎들을 떨구어 내려 오늘도 애를 쓴다. 사랑이 없었던 기다림과 나만의 잣대와 내 마음이 좋을 때만 했던 이중적인 배려 등을 나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었기에 이 늦가을에 다 떨구어 내고 비움의 시간을 준비하려 한다. 그 비움의 자리에 성령께서 오시어 활동하시길 청하며, 앞으로는 저의 마음에 ‘사랑’이 빠진 그 어떤 다짐도 자리 잡지 못하도록 늘 깨우쳐 주시길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성애 (소화데레사·꾸르실료 한국 협의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