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장작의 말 / 변재섭

변재섭(안토니오) 시인
입력일 2020-11-03 수정일 2020-11-03 발행일 2020-11-08 제 321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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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남반구로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있다. 물거리에 불을 붙여서 장작불을 지핀다. 불길이 퍼져 가는 걸 바라보면서 무념으로 아궁이 앞에 앉아 있노라니, 장작이 나를 깨운다. ‘톡톡’ ‘타닥타닥’ 작은 나무는 작은 소리로, 큰 나무는 큰 소리로 나 이렇게 마지막으로 몸을 살라 구들을 달구고 있다고. 문득 하늘을 향해 닦아 가던 그 푸른 길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고, 땅의 품속에서 싹을 틔우고, 주어지는 모든 여건들을 가냘픈 몸짓으로 견디어 내며, 한 하늘을 열고 한 터전을 거느리게 되었으리라. 평화의 시간이 있었는가 하면 두려움의 시간도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오직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늘의 햇빛과 비, 바람과 벌, 그리고 땅의 넉넉함 그 모든 것이 있어 비로소 하늘 향해 길을 닦는 여정을 누릴 수 있었고, 그 기쁨으로 하여 보람을 기꺼이 내어 주는 삶을 살았으리라. 과욕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시련에 의지를 꺾지 않고.

숲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목들이 뿌리내려 살고 있다. 환경에 따라 둥치 큰 나무도 있고 나무 같지 않게 작은 나무도 있다. 큰 나무라 해서 작은 나무를 무시하지 않을뿐더러 우쭐대지 않고, 작은 나무라 해서 큰 나무에 기죽지 않으며 부러워하지 않는다. 주어진 대로 당당히 그리고 열심히 한 구성원으로서 울울한 숲을 이루어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하여 모든 나무는 한 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나눔을 행하며 산다. 날짐승 길짐승의 터전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꽃피우고 열매 맺어 그들의 일용한 양식 또한 제공한다. 숲의 나무들은 숲의 나무대로, 들판의 나무들 또한 그들대로 이 땅에 사는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벌나비나 새, 사람이나 짐승이 열매를 따간다고 해서, 벌레들이 육신을 갉아먹는다고 해서 어디 하소연이나 하던가. 그저 내어 주고 묵묵히 제 길을 닦아갈 뿐이다. 결코 저 혼자만 살기 위하여 몸집을 불려 땅을 차지하고 하늘을 차지하지 않는다.

무릇 사람도 이와 같아야 하리라. 어떤 시인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고 노래하였다. 그 소망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이루어졌으리라 믿는다. 작은 나무이면 어떻고 큰 나무이면 어떤가. 나무이듯 한 생을 살다 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하얀 진정을 심중에 바로 앉히고 말이다.

숲이나 들녘의 나무 밑으로 가서 앉아 보자. 그 나무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어떤 소리인가. 바람이 들면 바람이 말하게 하고 새가 들면 그저 새가 노래하게 할 뿐이다. 자신은 무언의 몸짓으로 하늘 향해 길을 열심히 닦아갈 뿐이다. 그러노라면 자연 그 노력으로 하여 보람의 열매 맺고,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세상에 퍼트릴 뿐이다. 계산 없이 하냥 열심히 살아가는 한 생일 뿐이다.

큰 소리만 친다고 큰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리라.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차별하거나 농락하지 않고, 그들의 처지를 살펴 이해하고, 그들도 이 세상을 이루는 한 구성원이며 내가 더불어 살아야 하는 내 이웃이라는 마음가짐의 옥토에서 비로소 큰 나무가 되는 것이리라.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 오롯하다면 비로소 작아도 큰 나무이리라.

일생을 닦았던 길이란 길 모두 거두어 일부는 어머니인 대지에 돌려주고 보람의 마지막 토막 몸뚱이마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는 장작, 그의 말을 주님 말씀 듣듯 마음으로 듣는 따뜻한 저녁이다. 말씀은 어느 때나 그리고 어디에나 있다. 모든 존재는 주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피조물이기에, 마음의 귀를 열면 그들을 통해 사랑 자체이신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장작불을 통해 말씀을 들었으니 오늘은 마음이 맑은, 들을 귀를 가진 복된 날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변재섭(안토니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