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10-05 수정일 2020-10-06 발행일 2020-10-11 제 321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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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선교 위한 수도자 양성
창립자 목이세 몬시뇰 한국 선교에 열정 쏟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창립자 목이세 몬시뇰.

1923년 11월,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모리스(John Edward Morris) 신부는 당시 전교회의 선교지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한국 이름을 목이세(睦怡世)로 지었다. 이듬해 1924년 8월 평안남도 영유본당에 제4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목이세 신부는 얼마 되지 않은 11월 11~28일 영유공소를 방문하고 남긴 기록 ‘주님을 위하여 고생을 낙으로’에서 자신이 “이 도보 선교를 통해 제2의 그리스도가 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후 한국 선교에 쏟은 그의 열정과 사랑은 제2의 그리스도적 삶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그는 한국 여성들 안에 내재한 선교사의 자질과 지도력을 직관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1926년 자신이 관할하는 영유에 수도 생활에 뜻이 있는 젊은 여성 공동체를 만들었다.

당시 평안남도 영유 사정은 열악했다. “진흙 성당, 통풍장치·전기·온방 시설 전무, 학교 없음, 사제관은 진흙치고 최고 상태의 집, 최대한 2인용”이라고 쓴 기록을 보더라도 그렇다.

열심한 신자들이 무급으로 전교를 하던 그때, 목 신부는 유급 선교사를 채용해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투신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4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새 벽돌 성당을 완공했고,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어학 학교도 지었다. 또 떠돌이, 고아, 장애인 등 갈 곳 없고 불우한 사람들이 있을 장소를 마련했다.

1930년 목 신부는 몬시뇰로 명명되며 제2대 평양지목구장에 임명됐다. 당시 평양지역에서는 미국계 개신교와 천주교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목 몬시뇰은 개신교와의 교류에 비중을 두면서 개신교 방문을 통해 그들의 선교 현황과 선교 방법, 또 역사적 전개 과정을 익혔다. 그런 노력 속에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많이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고 천주교 신자 수는 점점 늘어났다.

평양교구 선교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목 몬시뇰은 선교를 지속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더 나은 결실을 얻기 위해 업무에 전념할 능력 있는 여성 수도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당시 평양지목구에 파견된 메리놀 수녀회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는 별개로, 평양교구장 직속으로 그의 직접적 지시를 받으며 경험 있는 지도 편달을 따르는 방인 여자 수도회 창립을 원했다.

이에 따라 길의 인도자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그 축일인 1932년 6월 27일, 평양시 상수구리 257번지 기와집 두 채를 매입해 개조한 수녀원에서 5명의 입회자와 함께 첫 미사가 봉헌됐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시작이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