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열정적인 한글 연구 박해시대 선교사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09-22 수정일 2020-09-22 발행일 2020-09-27 제 3213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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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교회서적 편찬 원동력은 ‘복음화 사명’과 ‘한글 사랑’
어려운 조선어에 힘들었지만 과학적 한글에는 찬사 보내
여러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다양한 교회서적 제작·보급
복음전파 발판 마련 위해 사전과 교리서 제작에 힘써

한글을 공부하는 외국인 모습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는 많은 외국인들도 한글을 공부하고 있고, 최근에는 한류 영향으로 세계 젊은이들이 한글 노랫말을 공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 사람 중에도 한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던 19세기, 박해가 채 끝나지도 않은 시절부터 목숨을 걸고 열정적으로 한글을 배우고 연구하던 외국인들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이었다.

■ 어려운 조선말, 쉬운 글 한글

“매우 어렵고, 익히는 데에는 중국어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1861년 조선에 입국해 5년여에 걸쳐 선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칼레 신부는 조선어를 이렇게 평가했다. 칼레 신부는 조선어 문법서를 만들고 조선어와 중국어 체계를 비교하는 등 당시 조선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선교사다. 박해시기 조선 땅을 찾은 선교사들 기록에서는 우리말에 어려움을 겪은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조선 신자들을 만나 함께 생활하고 전례와 성사를 집전했다. 그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조선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음도 문법도 문자도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어떤 교재도 사전도 없었던 만큼 조선어를 익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라틴어에서부터 유럽 여러 언어와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어학에 능통한 선교사들이었지만, 조선어는 선교사들이 배운 그 어떤 언어보다도 배우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조선 글자인 한글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다. 배우는 것이 과학적이고 사용하는 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남녀노소와 배움 유무를 막론하고 신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한글은 더할 나위 없는 최고 글자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한글 공부에 열성을 기울였다.

선교사들의 이런 한글 사랑은 박해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1923년 「조선어교제문전」(朝鮮語交際文典)을 저술하기도 한 베네딕도회 에카르트 신부는 “만일 어느 민족의 문명이 그 언어와 문자로 평가돼야 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한민족은 모든 민족 가운데 첫 번째이며 최상의 민족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성 다블뤼 주교. 탁희성 화백 작품. 다블뤼 주교는 「중한불사전」 편찬을 진행했으며, 수많은 교회서적을 편찬했다.

자신이 설립한 배론 신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는 성 베르뇌 주교. 탁희성 화백 작품. 베르뇌 주교는 여러 교회서적들을 한글로 저술했고, 목판 인쇄소를 마련해 한글서적을 배급했다.

■ 사전을 편찬하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전을 빼 놓을 수 없다. 박해시기 선교사들도 박해라는 역경과 사목활동 속에서도 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사전편찬 작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1845년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다블뤼 신부(훗날 주교)다. 이미 많은 한자를 습득한 성 다블뤼 주교는 「중한불사전」(中韓佛辭典) 편찬을 진행하고 있었다. 1856년 입국해 배론신학교 교장을 맡았던 푸르티에 신부도 조선인 신학생들이 라틴어를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나한중사전」(羅韓中辭典)을 편찬하고 있었다. 또 프티니콜라 신부는 1864년 3만 단어 이상의 라틴어와 10만 단어에 가까운 우리말을 담은 「나한사전」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이들 선교사들이 순교하면서 자료들이 유실돼 현재는 이 사전들이 남아 있지 않다.

박해로 사전편찬 작업에 번번이 좌절을 겪었지만, 선교사들은 사전 편찬을 포기하지 않았다. 1866년 박해를 피해 중국에 머물고 있던 리델 신부, 페롱 신부, 칼레 신부 등은 사전 제작에 함께했다. 마침내 리델 신부는 1868년 사전 초고본을 완성했지만, 사전은 바로 간행될 수 없었다.

리델 신부는 조선대목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조선으로 입국 후 곧 체포돼 옥살이를 했고, 만주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사전 원고를 지켜내 1876년 코스트 신부에게 원고를 넘겨 줬고, 코스트 신부는 일본에서 이 사전, 즉 「한불자전」(韓佛字典)을 ‘프랑스인 선교사들’이라는 공동저자 이름으로 간행할 수 있었다.

「한불자전」 표제어는 한글로 시작한다. 이 이유로 「한불자전」은 고대 이집트 문자나 한자 같은 표의(表意) 문자들은 문자 자체가 복잡해 로마자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지만, 한글은 쉽게 습득할 수 있고 단시일 안에 발음할 수 있음을 들었다. 한글이 배우기 쉽고 편리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어를 배우는 데 필요한 사전을 읽기에 앞서 자음과 모음으로 한글을 구성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한글 사랑으로 만들어진 「한불자전」은 근대 방식으로 체계적인 어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첫 한국어 사전으로 손꼽힌다. 「한불자전」에 앞서서도 한국어 사전은 있었지만, 단어집 수준에 그쳤다. 이에 「한불자전」은 이후 등장한 여러 한국어 사전에 큰 영향을 줬고 한국어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불자전」.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한글 사랑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 한불사전이다.

다블뤼 주교가 직접 한글로 저술한 「성찰기략」 한글목판본.

■ 한글로 가르치다

선교사들이 이토록 우리말과 한글 연구에 열성을 올린 이유는 다름 아닌 신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더 많은 선교사들이 빠르게 우리말을 익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복음과 교리를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성 베르뇌 주교는 여러 교회서적들을 한글로 저술했고, 박해자들 눈을 피해 목판 인쇄소를 마련해 한글서적을 보급했다. 베르뇌 주교가 인쇄소 운영을 맡긴 성 최형(베드로) 문초 기록은 “「천주성교공과」를 처음 발간하니 4권 1질로 됐으며 3000여 벌을, 「성찰기략」은 60여 장이 1권으로 된 책이나 1000여 권 박아냈다”고 전하고 있다. 선교사들 노력으로 박해 중임에도 얼마나 많은 한글 신앙서적이 보급됐는지 알 수 있다.

베르뇌 주교는 1851년 우리나라 최초 사목교서인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통해 “교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언문(한글)을 배우든 한문으로 배우든 글자를 배우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며 교회서적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울 것을 권장했다.

박해시기 이후로도 선교사들을 비롯해 한국교회 한글공부 열기는 계속 이어졌다. 1932년 발표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에는 전교회장 임무로 여성들에게 교리뿐만 아니라 한글을 가르치고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들었다. 주교들에게는 출판물 출간에 반드시 새 철자법, 곧 한글 맞춤법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자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는 “한국교회는 한국과 한국어를 참으로 사랑할 때마다 애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프랑스 선교사들은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한국인 자신들로부터 무시 받던 한국어를 집대성해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