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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순교자들 발자취를 찾다] (4) 대전 목동성당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09-22 수정일 2020-09-23 발행일 2020-09-27 제 3213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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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남긴 상처 위에 순교로 피어난 ‘신앙의 꽃’
전쟁 당시 수용소로 사용된 성당 옆 프란치스코 수도원
공산군 위협에도 성당에 남아 신자들 지킨 하느님의 종 12명
수도원 학살로 사제 11명 순교

대전 지역 최초의 성당인 옛 목동성당. 현재는 거룩한 말씀의 회가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범죄다. 전쟁은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기 때문이다.(「사목헌장」 80항) 하느님을 거스르는 무차별 파괴행위 안에서도 올곧게 생명의 하느님만을 바라본 이들이 순교한 곳, 대전 목동성당을 찾았다.

■ 전쟁의 참혹함이 새겨진 곳

대전 중구 동서대로1365번길 19. 목동성당에 들어서니 어린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프란치스꼬 수도원’이라고 적힌 낡은 현판이 있는 입구 너머로 어린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평화롭다”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이곳은 ‘평화’가 아닌 ‘참혹’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한국전쟁 시기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으로 이뤄진 집단 학살이 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통곡소리는 대전 전역을 메울 정도로 쟁쟁했다. 공산군은 전쟁이 불리해지자 23~29일 자신들이 수용하고 있던 이들을 일제히 학살하고 철수했기 때문이다.

목동성당과 인근 언덕에 공산군이 학살한 시신들이 가득했다. 수일에 걸쳐 시신 속에서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을 찾는 사람들이 이 언덕을 헤맸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살행위로 많은 시신이 훼손돼 시신조차 찾을 수 없어 가족들 울부짖음만이 남았다.

1952년 충청남도가 이 시기에 학살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그 수가 1557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미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시신을 수습한 수를 감안하면 2000여 명에 달하는 수가 일주일 만에 한자리에서 생명을 잃었다.

■ 순교지가 된 성당

성당 옆 거룩한 말씀의 회 수도원을 향하는 언덕길로 올랐다. 언덕을 오르니 새하얀 성당이 나타났다. 목동본당 옛 성당이다. 이 성당은 대전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현재 거룩한 말씀의 회 수도원이 세워진 곳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대전은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 공산군은 프란치스코 수도원을 정치보위부 본부로 사용했다. 수도원은 비교적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고, 당시 수도원과 300m가량 떨어진 곳에 형무소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군은 충청남도 각지에서 사람들을 잡아 이곳에서 취조했고, 외국인이나 주요 인사들은 수도원에, 그 외 사람들은 형무소에 감금했다.

그 중에 당시 목동본당 임시 주임을 맡고 있던 하느님의 종 조제프 카다르 신부와 광주지목구장이었던 하느님의 종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을 비롯해 하느님의 종 11명이 감금돼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제들이 붙잡힌 이유는 이 지역 성직자들이 교회와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성당에 남기로, 순교하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합덕본당에서 사목하던 하느님의 종 필립 페렝 신부는 피란을 권하는 신자들에게 “내가 왜 피란을 가느냐”고 되물으며 “교회를 위해 내 사랑하는 양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본당 신부들도 성당에 남기로 결심했음을 밝히면서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천주께 감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느님의 종들은 순교를 각오했지만, 신자들이 잡히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애썼다. 금사리본당에서 사목하던 하느님의 종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공산군에게 체포되기 전 본당 미사에 오는 신자들에게 “이런 때엔 미사에 참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고해자들에게도 “이런 때엔 통회만 해도 된다”며 신변을 보호할 것을 단단히 일렀다.

하느님의 종 강만수(요셉) 신부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보위부에 체포돼 심문을 당했는데, 심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신자를 보고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는 모습을 보이고 지나갔다. 신자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유도 심문에 넘어가지 말고 풀려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수용소가 된 수도원 환경은 열악했다. 공산군이 대전 시가지로 진입할 무렵 총을 난사해 벽에도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고, 지붕도 한 모퉁이가 날아가 버린 곳이었다. 또 한 방에 20여 명을 가두고 아침과 저녁 식사로 볶은 보리쌀 한 줌을 줬다.

하느님의 종들은 갇혀 있으면서도 신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 당시 수도원에 갇혔다 풀려난 이들은 “하느님의 종들이 신자가 잡혀 와 심문이라도 받고 있을 때면, 심문이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했다”고 증언했다.

마지막까지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놓지 않았던 하느님의 종들은 9월 23~26일 사이에 일어난 수도원 학살 중 순교했다. 공산군이 떠나고 신자들이 성직자들 시신을 찾아 헤맸지만, 비교적 훼손이 덜 된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 유해만을 찾을 수 있었다.

현 목동성당 옆에 자리한 ‘프란치스꼬 수도원’의 입구.

대전 목동성당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

■ 순교의 행진

수도원에서 성직자 11명이 순교했지만, 목동본당 임시 주임으로 성당과 신자들을 지키고 있었던 하느님의 종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서울로 압송됐고, 겨울이 다가오자 죽음의 행진 대열에 서게 됐다.

죽음의 행진은 공산군이 포로들을 강제로 이동시키는 행군이다. 포로들은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추위와 질병, 배고픔에 시달리며 행군을 강행해야 했다. 포로가 병에 걸리거나 쇠약해져 행진을 할 수 없게 되면 공산군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카다르 신부는 당시 73세 고령이었고, 한쪽 눈도 실명된 상태였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딜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의 행진을 함께 겪은 이들은 카다르 신부가 늘 기쁘게 기도했다고 기억한다. 함께 죽음의 행진을 한 셀레스텡 코요스 신부(한국이름 구인덕, 1993년 선종)는 카다르 신부가 쇠약해지고 상처가 곪아 고통을 겪으면서도 “산 저쪽 비탈에 떨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자”고 말하는 등 끊임없이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카다르 신부는 1950년 12월 17일 중강진에서 병으로 순교했다.

“코요스 신부, 나하고 같이 로사리오 기도를 바칠까? 나는 아직 세 단의 묵주신공을 더 바쳐야 하는데, 신부는? 신부는 환희의 신비를 하고 있어? 나는 고통의 신비를 하고 있어.”

카다르 신부가 마지막까지 지켰던 성당 앞에서 카다르 신부가 코요스 신부에게 했던 말이 꼭 내게 하고 있는 말처럼 느껴져 묵주를 꺼내 들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던 하느님의 종들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터였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