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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상] 주교와 신부는 아버지와 아들/두봉 주교

두봉ㆍ레나도 주교ㆍ안동교구장
입력일 2020-09-11 수정일 2020-09-11 발행일 1989-08-20 제 1668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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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해석은 하지 말아야
주교와 신부의 관계는 마치도 한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주교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키우면서 그를 보살펴 주고 감싸주는 등 무척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자식을 무턱대고 자주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남들 앞에서 아들 칭찬하는 아버지를 바보라고 하는데 아들이 기특하게 보일 때에도 남들 앞에서는 오히려 자기 아들을 곧잘 나무라곤 합니다. 주교 역시 신부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밖에 계시는 분들은 주교와 신부의 사이가 이렇게 부자지간의 관계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교회를 그저 행정기관과 같은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최근에 주교들이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대해서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한마디 말을 했다고 해서 교회 안에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분석ㆍ평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법 당국은 이것을 기회로 이제 신부를 구속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가톨릭교회를 잘 모르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 일로 인하여 주교와 신부들이 서로갈라지지 않습니다. 깊은 신앙의 차원에서 서로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교들의 대다수가 나이 많은 사람들이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은 대다수 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대차이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주교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젊은 신부들은 진보적인 성향이 있지만 서로가 한 가족입니다.

객관적으로 무리한 일을 지른 아들을 보고 앞뒤를 충분히 생각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쉽게 생각하는 점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어버이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충고하고 지적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남의 아들을 두고 꾸짖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심 아들의 용기가 장하게 보이지만 혹시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그르칠 수 있다는 일말의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하는 일이 나주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잘 되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소망이 담긴 나무람입니다. 물론 그런 내색을 겉으로는 감추고서 말입니다.

주교와 신부의 관계가 교구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쌍방의 성격이나 받은 교육, 경험, 혹은 신부의 수와 교구의 전통 또는 환경에 따라서 꼭 같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구마다 분위기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같은 것이 있습니다. 주교가 신부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유익하고 행복한 사제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 기도 중에 늘 기억하고 있다는 것 등은 꼭 같습니다.

주교도 감정을 가진 사람인지라 신부 때문에 기뻐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신부 때문에 섭섭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예쁘게 보이기도 하고 밉게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주교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사람은 신부요, 가장 큰 슬픔을 주는 사람 또한 신부입니다. 주교는 신부를 아들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교와 신분의 관계를 제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주십시오.

두봉ㆍ레나도 주교ㆍ안동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