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전쟁 순교자들 발자취를 찾다 (2) 패트릭 라일리 신부 순교터·춘천교구 묵호성당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09-08 수정일 2020-09-08 발행일 2020-09-13 제 3211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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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는 양떼를 두고 떠날 수 없어”… 그날의 외침 들리는 듯
전쟁 당시 묵호본당 주임으로 신자들 보호하고자 피난 거부 공산군에 체포돼 총살로 순교
라일리 신부 기념하기 위해 묵호성당 짓고 본당으로 승격

라일리 신부 순교터를 향하는 길.

동해에서 강릉을 향하는 7번 국도 길목.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16-2번지 인근을 지나자 우측에 ‘라 파트리치오 신부님 순교터’라는 푸른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자들을 위해 본당에 남은 라 파트리치오 신부, 바로 하느님의 종 패트릭 라일리 신부의 순교터다.

■ 인적 없는 순교터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따라 나 있는 작은 길을 오르자 라일리 신부를 기리는 순교비가 나타났다. 길의 끝에 순교비만이 있어, 이 길이 순교비를 순례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마련한 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날 지나간 태풍으로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이곳저곳에 낙엽과 가지들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강릉 피래산 자락에 자리한 고개 ‘밤재’, 산과 국도, 철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등산로도 아닌 길이었기에 순례를 목적으로 찾아오지 않는 이상 누군가 지나칠 리 없는 곳이었다. 춘천교구 묵호본당이 눈에 띄게 걸어 놓은 현수막이 없었다면, 이 자리를 찾기조차 어려웠을 터였다.

인적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인 순교비를 보니 어쩐지 라일리 신부의 유해가 이곳에 방치됐던 70년 전의 이맘 때가 그려졌다. 동해시 묵호에서 공산군에게 잡힌 라일리 신부는 공산군에게 강릉으로 끌려가던 중 1950년 8월 29일 이곳 밤재에 자리한 터널 인근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7월 말부터 거의 한 달 가까이 무더위와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상한 음식을 견디며 옥살이를 한 라일리 신부는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이송 과정에서 라일리 신부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공산군이 라일리 신부를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라일리 신부 유해는 1950년 9월 28일 강릉이 수복된 이후 그를 기억하는 신자들의 노력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 현재 라일리 신부 유해는 춘천 죽림동 춘천교구 성직자묘역에 안치돼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달이 넘는 시간, 지금 우리가 순교자 성월로 지내는 이 시기에 순교자 유해는 제대로 수습되지도 못한 채 이곳에 방치돼 있었다.

■ 양떼 곁의 목자

“양떼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느냐.”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자들은 당시 춘천교구 묵호본당 주임이었던 라일리 신부에게 함께 피난 가기를 요청했다. 신자들은 공산군이 묵호 인근에 올 무렵까지도 배를 마련하면서까지 피난을 권유했지만, 라일리 신부 답변은 요지부동이었다. 라일리 신부에게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한이 있더라도 목자가 있을 곳은 양떼 곁일 뿐이었다.

당시 전교회장이었던 남봉길(프란치스코) 회장이 거듭 피난을 청했지만, “피난 안 간 교우들도 많고 회장님도 안 가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나는 성당에서 죽어도 괜찮으니, 나 때문에 못 가지 말고 얼른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라”며 오히려 남 회장을 걱정했다. 라일리 신부는 남 회장의 끈질긴 권유로 마지못해 일본식 가옥에 마련했던 성당을 떠나 만우리에 있는 남 회장의 집에 머무르며 미사를 집전했다.

남 회장의 노력으로 강릉이 공산군에게 점령된 이후에도 라일리 신부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군은 라일리 신부가 묵호에 있었음을 알고 수색망을 좁혀 왔다. 남 회장은 공산군이 마을을 수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라일리 신부에게 다락방에 숨어 있기를 청했지만, 라일리 신부는 “자신이 붙잡히면 괜찮아질 것”이라며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날 라일리 신부는 공산군에 붙잡혔다.

춘천교구 묵호성당의 모습. 성당은 1957년 라일리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신축됐다.

춘천교구 묵호성당에 위치한 패트릭 라일리 신부 순교비.

묵호성당 순교비 아래 설치된 라일리 신부의 약력이 담긴 비.

라일리 신부가 순교한 강릉 범재에 세워진 순교비.

■ 착한 목자를 기리는 성당

라일리 신부의 순교터에서 남쪽으로 15㎞가량 이동해 라일리 신부가 죽기 전까지 사목했던 묵호본당을 찾았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하얀 기둥에 하늘빛깔을 띤 외벽이 인상적인 고딕성당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성당 모습에 순례를 위해 성당을 방문하는 이뿐 아니라 비신자들까지도 찾곤 하는 곳이다.

이 성당은 라일리 신부 생전에는 없던 곳이다. 그러나 라일리 신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당이자, 무엇보다도 라일리 신부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곁을 지켰던 묵호본당 공동체의 성당이라는 점에서 라일리 신부를 기억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장소다.

사실 라일리 신부가 순교한 이후 묵호본당은 목자 없는 공동체로 남겨졌다. 전쟁 이후 사제 부족으로 사제파견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호본당은 라일리 신부를 기억하기 위해 다시 본당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춘천교구장 구인란(Thomas F. Quinlan) 주교는 한국전쟁으로 순교한 사제들을 기억하는 본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1957년 라일리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묵호성당을 신축하고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묵호성당 옆에 펼쳐진 마당 한 가운데에 ‘라 바드리치오 순교비’라고 적힌 순교비가 서 있었다. 푸른 잔디 위에 서서 라일리 신부의 생애가 담긴 순교비 아래에 적힌 성경 글귀를 나도 모르게 되뇌고 있었다. 그 어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라일리 신부의 생애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