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나부코 / 신말수

신말수(비비아나) 소설가
입력일 2020-09-08 수정일 2020-09-08 발행일 2020-09-13 제 321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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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내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곤 한다. 열모로 쪼개어 보아도 보잘것없다. 저울에 앉혀 보아도 계기판 숫자는 유와 무를 가늠하는 0에서 주춤거릴 것이고 간장 종지에라도 담아 본들 얼안을 넘치지 못할 게 뻔하다.

화려한 모태신앙도 아니고 어느 자그마한 섬 공소에서 세례를 받고 두서없이 만난 하느님이신지라 내 신앙은 내세울 게 없는, 늘 추레한 입성 같다. 그러나 막내의 시작은 좀 다르다. 제대로 된 교리 공부에다 근사한 축하 꽃다발까지 받으며 엄숙하게 세례를 받았다. 막내의 세례명은 내가 특별히 선물했다. 다니엘이다.

나는 「다니엘서」 읽기를 즐긴다. 막내의 세례명이 다니엘이 된 연유이기도 하다. 「다니엘서」는 제대로 된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내 관심을 부추기는 한 인물도 있다. 네부카드네자르이다. 바빌로니아 왕인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레미야서」, 「열왕기」 등 성경의 여러 장에서 등장한다. 기원전 601년부터 20여 년간 집중적 공격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간 주인공이 네부카드네자르이다. ‘나부코’라는 말은 네부카드네자르를 이태리어로 줄여서 쓴 말이다.

이 유대 민족들 수난의 역사를 오페라로 담은 음악가가 있다. 음악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주세페 베르디이다. 오페라 나부코는 두 아이와 아내를 한꺼번에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베르디에게 삶의 끈을 쥐게 해 준 구원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음악의 성공으로 그는 빛나는 후속 음악을 많이 작곡하게 된다.

나부코 왕을 흥미롭게 만난 것은 내가 정신분석학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느 분석학자의 글 속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인류 최초의 정신 질환 환자란다. 야훼의 벌을 받아 정신 질환을 앓다가 다시 복위해서 뉘우치고 겸손한 왕이 된다는, 그 기록이 「다니엘서」에도 있다.

이 오페라의 성공으로 한 음악가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 냈으니 나부코에게 이 업적만으로도 최고의 훈장을 주고 싶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 오페라의 찬란한 으뜸 꽃이다. 성경 속의 유대인 수난, 그 긴 역사를 오페라 한 편으로 압축시켜 세상에 내놓았으니, 이게 음악만의 위대함이 아닐까. 베르디의 이런 업적이야말로 찬사받아 마땅하다.

음악이 신앙심에 기여하는 경우도 많다. 먼 데서 찾을 필요 없이 우리 성당은 늘 음악이 넘쳐 난다. 강론이 끝나면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듯, 성가는 음전한 걸음으로 뒤를 따라나선다. 우리 신부님의 마술 주머니는 늘 신앙 치료제인 성가들로 불룩하다. 몸이 허약한 사람들에게 미음이나 죽의 흡수가 빠르듯, 믿음 결핍엔 성가 수혈이 효과적이라는, 신부님의 신앙 심는 법에 이미 길들여진 지 오래다. 평생 음악 듣기로 버티어 낸 삶이니 민감한 내 맘 또한 성가 자락 따라 길 나설 차비에 바쁘다. 쪼르르 무릎으로 올라앉아 함께 울자고 자꾸 보채는 어느 날이면, 그 부탁 거절 못해 나는 성가와 손 맞잡고 훌쩍거리기도 한다. 그 눈물이 내 신앙심의 가난을 조금씩 덜어낸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하늘에 둥실 무지개라도 뜰 것같이 맘 설레는 날, 베토벤이, 멘델스존이, 바흐의 칸타타까지 초대 손님처럼 등장할 적도 있다. 비틀스인들 어떠랴, 제아무리 분주한 로큰롤 선율이라도 우리 성당 무대에선 경건하고 거룩하게 성화되고 만다. 이렇도록 하느님 보시기에 참 어여쁘기 짝이 없을 강화 섬, 우리 마니산 성당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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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수(비비아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