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어느 비 오는 날의 얼굴들 / 임미정 수녀

임미정 수녀(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장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입력일 2020-09-08 수정일 2020-09-09 발행일 2020-09-13 제 321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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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나긴 장마, 게릴라성 폭우가 도심을 강타하던 날, ‘빠르기’로 유명한 ‘배달’앱 박스를 달고 대형버스들 사이에 좁게 끼어 있던 오토바이, 폭우에 아무 소용없는 비옷 위로 물폭탄을 맞으며, 헬멧 고글 안에는 빗물과 땀이 범벅이 된 채 초점 잃은 눈으로 신호를 기다리던 배달노동자의 얼굴.

#2. 폭우가 한바탕 남부지방을 훑고 가고, 농가들이 통째로 침수됐다 간신히 물이 빠진 후 복구 중인 한 농가를 비추는 뉴스 장면, 장판을 거둬 낸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식사하면서 또다시 온다는 태풍에 시름 겨워 눈물짓던 가난한 촌로의 얼굴.

#3. 서울 도심의 새벽, 탑골공원 삼일문, 긴 처마 밑에는 언제나 배경처럼 큰 배낭이며 박스를 옆에 끼고, 뇌우가 번갈아 치는 와중에도 때에 찌든 두꺼운 이불에 감싸인 채 미동도 없이 주무시고 계시던 노숙 어르신 얼굴.

이 장면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중심어가 된 2020년 그 하반기를 맞는 시간, 긴 장마 끝에 또다시 확산 중인 코로나19 공포와 연이은 대형 태풍 소식 등으로 힘겨운 일상에 마주하게 된 얼굴들입니다. 이 얼굴들과 제 삶의 여정을 묵상하다 떠오른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201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이 영화는 아흔을 바라보는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젊은 영화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화 운동)의 거장 ‘아녜스 바르다’와 젊은 사진작가 JR의 콜라보로 제작된 다큐 형식을 빌린 일종의 로드무비입니다. 프랑스 외곽 작고 허물어져 가는 마을들을 돌며, 그 마을과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형사진으로 출사해 건물 벽에 붙이는 작업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바르다는 자신이 늘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잊히고 사라지고 소외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의 서사를 가치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바르다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비참함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찾아간 공간의 비참함과는 달리 바르다와 JR의 세대를 뛰어넘는 유쾌함과 사람들과 따뜻한 만남과 시선, 희망의 여정 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중에 바르다는 이들 얼굴에서 삶의 특별한 서사를 읽고 그것을 장면에 담아서 그들 스스로에게 기분 좋은 메시지를 안겨 줍니다. 올해 유난히 길었던 장마에, 폭우와 홍수로 수해 입은 이들의 어려운 소식이 들려오고, 그 와중에 대도시 한 편에서는 여러 이유로 안전에서 내몰린 이들의 얼굴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이 얼굴들을 마주하면서, 이들 삶 속에서 최고의 시간, 스스로 기분 좋아지는 그때의 서사는 무엇일까? 그것을 읽고, 또 그들 스스로 그 시간을 찾을 수 있도록 함께하는 여정이 신앙인이 가야 할 복음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만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2019년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해 주제인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 9,19)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신앙은 불의나 고통,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도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는다는 심오한 진리를 드러낸다”고 하시며 “주 예수님 제자들이 진정한 복음 선포자가 되길 원한다면 구체적인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한 기후행동단체에서 올해 장마를 정의한 문구가 많이 회자 됐습니다.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 앞서 올린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기후위기’는 이제 우리와 아주 가까운 일상이 됐습니다. 교황님이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강조한 생태위기에 쉽게 노출되는 두 부류, 지구 생물종들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우리 귓가에 점점 더 가까이 들릴 것입니다. 이들 얼굴에서 비춰지는 생애 가장 아름다운 때의 서사를 읽어 내고, 그 메시지로 인해 그들 스스로 일어나 구조적 변화에 동력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 선포자로서, 희망의 씨를 뿌리는 이들의 ‘사랑의 의무이자 특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밖에는 세차게 비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인들과 존중의 눈길로 바라보고 대화 나누며, 정성껏 마련한 도시락을 전하던, 마음 따뜻한 친구 수녀님 얼굴이 함께 겹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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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정 수녀(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장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