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9-08 수정일 2020-09-08 발행일 2020-09-13 제 321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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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려 노력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설립자 요셉 안토니오 마르케셀리 신부(왼쪽)와 안젤라 마리아 델 질리오 수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제공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부와 명예를 버린 채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삶에 매력을 느껴 찾아온 많은 이들과 평생을 복음적인 생활양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 순례자로 살았다.

성인과 동료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당시 시대 안에 청빈 운동을 일으켰고 세상에 머무르며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재속 3회, 즉 ‘프란치스코의 회개자(보속자)들 운동’을 태동시켰다.

1702년 수도 생활이 약화해 가던 시대적 상황 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취가 배인 아시시(아씨시)는 다시 한 번 쇄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중심이 된다.

이곳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요셉 안토니오 마르케셀리 신부(1676~1742)와 당시 재속 3회 회원이던 안젤라 마리아 델 질리오 수녀(1658~1736)는 재속 3회 회원들의 ‘작은 모임’을 출발시켰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의 시발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3회 회칙을 완전히 준수함으로써, 3회를 쇄신하여 성녀가 되게 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것을 통해 교회와 세상에 표징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립자들 계획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3회 회칙을 따라 프란치스칸 삶의 근원으로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 삶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미 성인의 영성을 따르던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더 작은 자, 더 작은 삶을 주창했다. 그래서 설립자들은 첫 공동체 ‘작은 모임’ 혹은 ‘거룩한 집’을 처음부터 프란치스칸적이고 복음적인 가치, 즉 ‘작음과 가난’을 실천하는 길로 받아들였다. 이는 일상생활 안에서 만들어지는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화의 길로 풀이된다.

마르케셀리 신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조화시키는 활동 수도회 생활양식을 택했다. 이로써 공동체는 반 관상 생활 형태로 운영됐다. 그는 첫 공동체 회원들이 자신이 작성한 회헌과 1289년 니콜라오 4세 교황이 인준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칙에 따라 살도록 했다.

1810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이탈리아 내 많은 수도회가 폐쇄됐을 때, 공동체는 당시 교육 사업을 하며 군인 자녀들을 가르쳤기에 수도복 없이 계속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후 1860년 이탈리아 정부의 억압 등 여러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수도자들은 200여 년 동안 아시시에서 현존하며 젊은 여성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1902년 전교 수도회로 전환한 수도회는 성좌 설립 수도회로 인정받았고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수도 3회 회칙을 공포했다. 회헌은 1934년 인준됐다. 1977년 총회까지 델 질리오회로 불렸던 수도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수도회 명을 변경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17개국에 진출해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