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수원교구 위대한 여성 순교자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9-08 수정일 2020-09-08 발행일 2020-09-13 제 3211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남편과 자녀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의연하게 순교

심순화 화백의 ‘복녀 이성례 마리아’.

■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

최경환 성인의 아내·최양업 신부의 모친

기해박해 때 젖먹이 막내아들과 체포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 어머니인 이성례는 ‘위대한 어머니’, ‘온전한 신앙인’으로 불린다. 박해의 고난과 가난함 속에서도 남편을 도와 가정을 돌보고 모성까지도 하느님 앞에 내놓았던 그의 모습은 신앙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충청도 홍주(현재 충남 홍성군 일대) 출신으로 내포 지역 사도 이존창(루도비코)의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던 그는 18세 때 최경한 성인과 결혼했다.

홍주 다락골(현재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살면서 1821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남편을 따라 신앙생활에 적합한 서울로 이주했으나 박해 위험에 강원도 김성을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재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로 옮겼다.

이곳에서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고, 그는 회장인 최경환 성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했다.

정든 고향과 재산을 뒤로 하고 자주 낯선 곳으로 이주하는 가운데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이겨냈다. 자녀들이 배고프다고 호소할 때면 예수의 십자가상 고난과 성가정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현세의 고난은 잠시뿐임을 일깨웠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이성례는 이런 모든 고난을 큰 영광으로 삼았다.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이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구하고 청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포도청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젖먹이 막내아들 스테파노와 수감되어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다. 이때 어머니로서 받았던 세상의 비난도 형벌에 못지않게 잔인했다.

최양업 신부는 훗날 서한에서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죽음을 자청하러 가느냐’는 모욕과 욕설을 감당해야 했다고 적었다.

남편이 매를 맞아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본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 사실이 알려지며 다시 체포돼 형조로 이송됐다.

이때 함께 옥에 있던 신자들의 권면에 용기를 얻은 그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순교를 결심했다. 막내가 결국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도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성지는 남편 최경환 성인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 복자 권천례(데레사, 1784~1819)

권일신의 딸이자 권상문의 동생

조숙과 혼인해 동정지키다 함께 순교

권천례는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자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경기도 양근(현재 경기 양평군 양평읍 일대)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아버지까지 여의었다.

어렸을 때부터 덕행과 신심이 남달랐던 권천례는 동정을 지키기로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오빠들은 순교하거나 유배에 처하면서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서울로 올라와 동정을 지키며 살고자 했으나 친척들 설득에 마지못해 21세 때 복자 조숙(베드로)과 혼인한다.

양근성지에 있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혼인날 ‘함께 정절을 지키며 살자’는 글을 건네자 당시 냉담 중이던 조숙은 마음이 변하여 아내 뜻에 동의하고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했다. 이를 계기로 조숙은 회심하여 완전히 변모했다. 이후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졌고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는 일상이 됐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성직자 영입에도 도움을 주었던 이들은 1817년 조숙이 신자임이 발각되면서 함께 옥에 갇혔다. 문초가 시작되고 배교가 강요됐으나 이들은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형벌을 참아냈다.

사형이 확정되지 않아 감옥 생활이 길어지는 가운데 조숙의 마음이 약해지자 권천례는 힘을 북돋우며 하느님을 위해 같은 날 순교할 것을 결심하게 했다.

2년 이상 갇혔던 그는 1819년 8월 3일 남편 조숙과 같이 참수됐다. 처형 후 시신을 본 한 여신자는 ‘얼굴과 몸 전체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고 증언했다. 신자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했고 그 중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평 양근성지에서 남편과 함께 복자 권천례를 현양하고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