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수원교구 위대한 여성 순교자 (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9-01 수정일 2020-09-02 발행일 2020-09-06 제 321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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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 교회 원동력은 여성이었다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 속 반상(班常) 구별이 엄격했던 봉건 사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여성 신자들은 설립 초기부터 교회 발전 원동력이었다. 특별히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을 증거하며 피로써 신앙을 드러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특별히 교구와 관련 있는 여성 순교자들 자취를 살펴본다.

■ 복자 강완숙(골룸바, 1761~1801)

주문모 신부에 의해 여회장에 임명

계급 초월해 양반·머슴까지 복음 전파

신유박해를 전후해 남녀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활약으로 명성을 떨쳤던 강완숙. 역사학자 영남대 김정숙(예수의 아기 데레사) 교수는 강완숙을 두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까지 조선 신자 전체를 꿰는 벼리에 해당하는 인물’로 평가한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최초 여회장에 임명됐던 그는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복음 전파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동정녀 등을 모아 교육 활동까지 지도했다. 특히 명도회 여회장 직분은 남녀가 유별한 양반사회에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정식 직책을 맡은 단초로 여겨진다.

이처럼 강완숙은 한국 교회사에서의 위치는 물론 한국 여성사 안에서도 주목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습에서 당해야 했던 억압이나 유폐적인 제한 등 당시 여성 한계성을 극복하며 활동했던 특출한 여성이었다.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

충남 예산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였던 강완숙은 홍낙민이라는 시가 친척으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됐고, ‘천주’라는 단어에 깊은 감명을 받아 믿게 됐다. 이후 시가와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 복음을 전하고 신해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남편 홍지영이 후환을 두려워하며 떨어져 살기를 원하자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 그리고 전처소생인 복자 홍필주(필립보)를 데리고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 도착 뒤 교회가 뿌리내리는데 필요한 봉사와 전교 생활에 전념했다.

주문모 신부 영입에도 적극 동참하며 경제적인 뒷받침을 했던 강완숙은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으며 활동을 도왔다. 세례를 받고 여회장에 임명되면서 전교를 전담하며 동시에 교회 일을 맡았던 그는 상하 계급 질서를 벗어나 양반 부녀자들부터 머슴, 하녀까지 입교시켰다. 그런 가운데 여성들을 모아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1만 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그중에서도 여성 신자가 절대다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고 집을 지키다 그해 4월 6일 체포돼 7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옥에 갇힌 3개월 동안에도 그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형 판결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게 될지라도 천주교를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교구 어농성지는 그의 가묘를 조성하고 현양하고 있다.

■ 복자 윤점혜(아가타, ?~1801)

강완숙 도와 교회 일에 전념

동정녀 공동체 만들어 함께 신앙생활

윤점혜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여러 동정녀 중에서도 행적이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꼽힌다.

경기도 양근(현재 양평읍 일대) 양반 가문 출신인 윤점혜는 어머니를 통해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를 알게 됐다. 복자 윤유일(바오로) 사촌 동생이자 복자 윤운혜(루치아) 언니였던 그는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윤유일이 사형 당하고 모친이 별세하자 강완숙의 집으로 옮겨와 10여 년을 함께 살았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강완숙을 도와 교회 일에 전념했고 체계적으로 교리를 배워 익히고 전교 활동에도 열심히 나섰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일찍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동정 생활을 염원했던 그는 공동체 회장으로서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치며 자신도 엄한 극기 생활과 기도와 묵상에 열중해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됐다.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는 강완숙과 함께 체포돼 석 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고 1801년 7월 4일 고향인 양근의 형장에서 참수됐다. 양근으로 끌려간 것은 그곳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는 우윳빛이 나는 흰색 피가 솟았다고 한다.

교구 어농성지에 그의 가묘가 세워져 있다.

어농성지 순교자 묘역.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