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자 강완숙(골룸바, 1761~1801)
주문모 신부에 의해 여회장에 임명
계급 초월해 양반·머슴까지 복음 전파
신유박해를 전후해 남녀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활약으로 명성을 떨쳤던 강완숙. 역사학자 영남대 김정숙(예수의 아기 데레사) 교수는 강완숙을 두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까지 조선 신자 전체를 꿰는 벼리에 해당하는 인물’로 평가한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최초 여회장에 임명됐던 그는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복음 전파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동정녀 등을 모아 교육 활동까지 지도했다. 특히 명도회 여회장 직분은 남녀가 유별한 양반사회에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정식 직책을 맡은 단초로 여겨진다.
이처럼 강완숙은 한국 교회사에서의 위치는 물론 한국 여성사 안에서도 주목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습에서 당해야 했던 억압이나 유폐적인 제한 등 당시 여성 한계성을 극복하며 활동했던 특출한 여성이었다.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
충남 예산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였던 강완숙은 홍낙민이라는 시가 친척으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됐고, ‘천주’라는 단어에 깊은 감명을 받아 믿게 됐다. 이후 시가와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 복음을 전하고 신해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남편 홍지영이 후환을 두려워하며 떨어져 살기를 원하자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 그리고 전처소생인 복자 홍필주(필립보)를 데리고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 도착 뒤 교회가 뿌리내리는데 필요한 봉사와 전교 생활에 전념했다.
주문모 신부 영입에도 적극 동참하며 경제적인 뒷받침을 했던 강완숙은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으며 활동을 도왔다. 세례를 받고 여회장에 임명되면서 전교를 전담하며 동시에 교회 일을 맡았던 그는 상하 계급 질서를 벗어나 양반 부녀자들부터 머슴, 하녀까지 입교시켰다. 그런 가운데 여성들을 모아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1만 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그중에서도 여성 신자가 절대다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고 집을 지키다 그해 4월 6일 체포돼 7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옥에 갇힌 3개월 동안에도 그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형 판결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게 될지라도 천주교를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교구 어농성지는 그의 가묘를 조성하고 현양하고 있다.